적먹 전력 60분 [꿈]

제목은 포와포와P의 하츠네 미쿠의 오리지널 곡에서 따왔습니다.



느긋한 주말이었다,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될 날이었으며 아침 식사는 잠시 뒤의 간단한 브런치로 해결 될 평범한 날. 아카시는 눈을 깜빡이며 제 옆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마유즈미는 잠이 아직 덜 깼는지 아카시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었다. 연하늘빛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서서히 들어온다.


그러고보니, 꿈을 꿨습니다.

꿈? 


꿈을 꾸는게 흔치 않은 아카시였을터인데 오랜만에 꿨다고 하니 궁금하기는 한지 마유즈미의 게슴츠레한 눈이 조금 열린다. 마치 아이의 잠을 깨우는 부모같군, 라고 생각하며 아카시는 살짝 웃었다. 맞잡은 손이 꿈지럭거리며 이야기를 재촉한다. 먼 곳을 보는듯이 아카시의 눈은 아이보리색 천장을 향했다.


예전의 마유즈미 상과, 제 모습이 나오는 꿈이었습니다만... 평범한 그런 하루였네요. 

악몽이 아녀서 다행이군.

마유즈미 상이 갑자기 괴물로 변해 절 쫓아오진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예전이라면 언제? 학창 시절? 

아뇨, 그보단 더 이후군요.

대학생 시절인가.


그때 우리 둘이 어땠더라, 하며 마유즈미는 뻐근한 몸을 움직여보며 같이 회상해보는 듯 했다. 아마 여러가지를 떠올렸을테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고, 이내 뒤척이며 엎드리자 그 위에 아카시가 포개어져 뒷 목에 키스를 해버려 생각하던 내용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단 하나의 의문만 빼고.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던가? 



-



날씨가 좋네요.


마유즈미는 전공 서적이 들어있는 가방의 무게따위는 상관 없었다. 그 때로부터 2년 후, 자신을 쫓아 교토대로 쫓아온 후배 녀석이 신경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번주 입학식때부터 캠퍼스 내에서 잔뜩 시선을 받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 도련님은 제 곁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뻔뻔한 얼굴로 걷고 있었고, 정신 차려보면 왜 자신은 또 이 녀석에 곁에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녀석과 함께 있을땐 자주 이렇게 통제불능인 상황들이 일어났었긴 했지만 이젠 예전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할 말이 그거밖에 없나.)

건강하셨나보군요.

(왜 날 보고 웃냐? 지금 첫 주부터 과제폭탄을 맞아 썩어가고 있는 3학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건가. 자체 필터 적용인가.)

그러고보니 어젯 밤에 꿈을 꿨습니다.


대답도 안 해줬는데 이야기도 참 잘 혼자 한다 싶어 두었더니 갑자기 꿈 얘기다. 제 표정을 보고 '딱히 흥미 없다' 라는 마음을 읽었는지 못읽었는지 아카시는 계속 혼자 중얼거린다. 애초에 제 반응은 중요한게 아녔을지도 모른다.

 벚꽃잎이 비처럼 하늘거리며 쏟아졌다. 흠, 배경만큼은 낭만적이군.


마유즈미 상의 졸업식, 아니. 퇴임식때였나. 헷갈리군요. 아무튼 옥상에서 마유즈미상과 만났을때의 일을 꿈으로 꾸었습니다.


그리운 말이긴 하다. 라쿠잔 고교의 옥상, 이미 이년도 더 된 때의 장소. 감상과 추억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지만 아카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왜인지 너무나도 그리운 느낌이 들어버렸다. 뭐지, 이건. 마유즈미는 밀려들어오는 기묘한 감각에 혼자 몸서리쳤다. 이런건 익숙치 않다.


잘 생각나지 않으니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뭐든 상관 없는거 아닌가,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유즈미는 교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꿈에 상대방이 나왔다고 말하며 얘기를 거는건 뭔 수작이지. 마치 넷에서 보던 '같잖은 대시 어택법'이 생각나 마유즈미는 표정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맘속으로만) 아카시가 식당까지 쫓아올 낌새였다.


그런데 아까 그 상황, 언제 있었던 일 같은데. 이런게 데자뷰인가.



-



졸업 축하드립니다.


결국 졸업식장에서 보이지 않던 그를 찾아낸 곳은 역시 옥상 위였다. 아카시는 가지고 온 꽃다발을 전하며 뭘 이런걸 다, 라는 표정을 내비추는 마유즈미를 바라보았다. 오늘로서 그는 여기를 밟는게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토대의 옥상은 어떠려나, 여기와 비슷한 풍경은 아닐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도 않을테고.


어젯 밤에 꿈을 꿨습니다.

그래? 


무슨 꿈이었는데, 라는 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천천히 아카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붉은 장미는 희미한 그에 비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뽐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붉은 꽃과 먹빛의...짝사랑 상대. 지나치게 자신이 감상적이게 되어버린걸 느껴버려 헛웃음이 나왔다.


결승전 경기중의 일을, 꿈으로.

너 트라우마라도 생긴건 아니겠지?


웃기다는듯이 바로 답해오는 그는 여전히 그였다. 나는 정말로 나일까.


아닙니다.


미소를 짓고, 더 할말은 없었다. 있어도 꺼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교토대 입학 축하드립니다. 저도 지망으로 둔 학교인데, 잘 됐군요.

하아, 그래. 고마워. 뭐... 공부 힘내라고.


짧은 막간.


농구도 열심히 하고.


아카시는 몸을 돌려 옥상을 떠났다. 마유즈미는 난간에 턱을 괴고(평소의 그는 잘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운동장 아래를 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 흩날리는 벚꽃. 웃고 우는 소리들. 아카시의 모습이 아래에 보일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무슨 말, 언제 들었던거 같은데.



-



치히로.


마유즈미는 신발 끈을 묶다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뭔 용건이지,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 아카시는 문득 왜 자신이 치히로를 불렀나 답지않게 헷갈렸다. 지금은 공의 시간이다. 사적인 이야기는 뭐든 경기가 끝나고 나서다. 

사실 둘 사이의 사적인 얘기도 그닥, 그동안 많지도 않았지만.


플랜들은 다 알고 있겠지. 컨디션은 어때.

알아, 그리고 나쁘지 않아.


아카시는 문득 새벽에 꾼 꿈이 생각났다. 꿈을 정말 거의 꾸지 않는 그인데 왜이리 오늘따라 생생히 기억났을까. 어머니가 있던 시절에 농구를 하던 어린 제 모습이었다. 누구에나 말하고 다닐 꿈 내용은 아니었다, 아니. 꿈 내용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그럼 믿고 있겠어.


5번 등 번호를 달고 있는 신형 식스맨을 뒤로 하고 아카시는 걸어 나갔다. 세이린과의 결승전 경기는 곧 시작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괴로움도 뒤로 한지 오래였다. 그런것 따윈 없었다. 오직 승리, 뿐이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꿈도 필요 없었다.



-



엄마!

꿈을 꿨어요. 침대에서 누구랑 같이 누워있는 꿈이었는데. 

아뇨, 악몽은 아니었으니까요. 괜찮아요. 같이 얘기하고 그랬는걸요. 

사이 좋았어요. 누구인지는 생각 안나지만... 

제가 꿈에서 어른이 되었던거 같아요. 그 사람이랑 같이 농구 얘기도 한거 같고. 친구였을까?

아... 들어갔다! 엄마, 보셨어요? 

어른이 되면 더 높은 곳에 한번에 슛을 넣을 수 있을거에요. 

그때까지 봐 주실거죠? 

엄마.



-



침대 헤드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다가 마유즈미는 다시 잠든 아카시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길래 그동안 일좀 쉬엄쉬엄하라니까,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제 쪽으로 몸을 돌려 껴안아온다. 당황해 커피잔을 협탁에 조심스레 내려두었다.


"치히로..."


아카시는 또 꿈을 꾸고 있는걸까. 작은 잠꼬대로 제 이름을 부르는거 보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몸을 뉘여 그와 마주보고 입술을 살짝 맞춘다. 


세이쥬로. 이름을 속삭이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이러다 깨울까싶어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면 바로 일어나 잠을 깨울거 같았다.


오래오래, 자라고. 또 꿈꿔도 되니까.


꿈같은 나날을, 아니. 행복한 현실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아카시가 또 꿈을 꾸는 날은 먼 미래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