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지 않아.] 


아카시 세이카는 낮게 울려퍼지는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지내온 일생동안 지금껏 그녀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어서가 아녔다. 분명 상대에게는 좋은 제안이었으며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텐데 자신이 준비해둔 하나의 포석이 너무나도 손 쉽게, 단 두 음절로 부숴졌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몰라서 묻는거냐, 정말로? 하, 나는 절대로 앞으로 나서고 싶지 않아. 그런 속성을 가진 인물이 애초부터 아닐뿐더러 그런 삶은 앞으로도 원하지도 않고, 옆에서 보는 것도 즐기지 않아. 학생회같은건 네 친위대라고 암묵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정도야 나도 알고 있어.] 

[그런건 헛소문일 뿐입니다. 학생회장의 권한은 라쿠잔 여고에서 그다지 크지 않아요.] 

[알아, 네가 오기 전엔 그랬지. 하지만 '아카시 세이카'의 권한은 비정상적이란걸, 그 누가 모를까.] 


명백한 비꼼이었다. 그 말 사이사이에 자기 자신은 절대로 너와 다른 타입이고, 너 같은건 부러워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는 느낌까지 실려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었다. 아카시는 자신의 계획에 그녀가 꼭 필요했고, 그녀를 제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협박이라도 해야했다. 협박을 하기 전에, 아카시는 마지막 강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이 미끼는 먹힐지 먹히지 않을지 확률이 반반이었다. 애초에 '마유즈미 치히로', 그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채로 왔던게 무리수였다. 


─존재감 없는 소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녀. 마치 그림자를 언제나 두르고 그 안에 녹아있는 듯한 소녀. 그녀는 삼학년이었지만 아카시의 라쿠잔 교내 정복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장기말 중 하나로 유용하게 쓰일법했다. 중학교때 그녀와 비슷한 타입의 동급생을 발견해냈던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지만 동급생도 이쪽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구나,…애초에 선배라는게 문제였을까. 


[한가지 조건을 더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응하지 않을 시 저도 마지막 패를 내 보일 수 밖에 없네요.] 

[그 마지막이라는 것조차 마지막이 아닐게 안다만.] 

[마유즈미 선배, 소원을 한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설령 그것이 윤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제가 되는 것일지라도.] 


아카시는 이럴때 어떤 목소리로 상대 앞에서 말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탁속에 명령을 집어넣어 교묘히 포장한 달콤한 울림이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카시 세이카, 그녀가 이런 내용을 말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누구든지 이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수행하게 될 주문이었다. 마유즈미 치히로는 먹색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걸 개의치 않고 똑바로 세이카를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다만 웃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세이카의 붉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상당히 나를 높게 봐주시는거 같은데 저런, 난 내가 가장 좋아. 누군가 날 위해 해줄 수 있는건 아쉽게도 없는데 어쩌지. 그 뿐이야. 협상 결렬이네. 돌아가 봐, 다음번엔 내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받아들일법한 그런 조건을 제시해오라고. 라쿠잔의 여왕님. 네 존재와 능력에 난 미안하지만 흥미 없어.] 


느긋하고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도발까지 섞은 그 말을 들은 아카시는 마유즈미에게 다가가 충동적으로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시계장치의 능금과 벌꿀과 여동생」, 귀여운 여자아이가 그려져있는 작은 소설책. 아마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던가, 서브컬쳐쪽의 매니악한 취향이다. 


[학교 품위수칙에 어긋나는 관계로 이건 죄송하지만 압수하도록 하죠. 돌려받고 싶다면 학생회실로 언제든지 와주세요. 그 외의 용건도 환영하니까.] 

[하아? 이쪽에서 빌려주는거야. 그렇게나 읽고싶었나보지. 안녕, 아카시.] 


단화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멀어진다. 아카시는 발걸음을 놀려 옥상을 나와, 계단을 성큼성큼 걷고 뛰어내려갔다. 하마터면 마유즈미의 앞에서 자신 안의 '그녀'가 나올 뻔 했다. 점차 그녀가 외부로 떠오르고 싶어하는 주기가 짧아져오고 있다. 그녀가 나오기 전에, 어서 자신의 왕국을 완성해야만했다. 교내 정복? 그런건 입학하고 나서 한달 안에 완성한지 오래였고, 단순히 외부로 보여지는 그녀의 계획이었다. 왕국은 그러한 단순한게 절대 아녔다. 이러나저러나 지금껏 해온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기에 침착해야만 했다. 아카시는 가쁜 숨을 내뱉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흘러내리는 붉고 긴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저도 모르게 아랫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적막한 가운데 옥상에 계속 앉아 있을 그 이름을 불렀다. 


[마유즈미, 치히로.] 


─아카시는 지금 또 다른 자신 안의 '그녀'를 죽여줄 후보자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유력한 열쇠인 그녀를, 놓칠수야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한번 그녀는 다음 방법을 찾기 위해 학생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쿠로코의 농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먹 4컷~03.04  (0) 2015.03.05
[적먹(赤黛)] 3월 1일  (0) 2015.03.01
[적먹(赤黛)] Processing  (0) 2015.02.18
[적먹+황립]이기적 연인들  (0) 2015.02.03
[먹적(黛赤)] 도피  (0) 201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