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유즈미 치히로는, 게임을 그만둘까 생각했다. 오래되어서 질린 쪽도 아니다, 그는 이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하교후 하루 한시간씩, 고작 일주일을 했을 뿐이다.


LV.15, 초보자 티를 아직도 벗지 못한 레벨에 썩 멋져보이지 않는 천 로브 장비. 클래스는 책과 지팡이를 동시에 쓰는 현자.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이제 막 초보자 마을을 벗어나 흥미진진 해질 시기인데...


"─그러니까 왜, 파티 퀘스트가 필수인거냐."


가상현실 게임이어서 첨단 기술로, 사람의 표정까지 세세하게 반영해주는 그래픽은 마유즈미의 찌푸린 미간을 나타내었다. 지금 마유즈미가 이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은, 다름이 아니라 던전의 입구였다. 초보자들이 처음 가게 되는 던전으로, 그 동안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잡 몹들을 잡거나 물건을 배달해주는게 다였으나 이제 진정한 모험가 다운 의뢰를 받아들이는 그런...스토리였는데, 보시다시피 큰 문제가 있다.


<<파티 퀘스트.>>


혼자 하는 콘솔 류가 아니라 온라인 게임인 이상, 누군가와 함께 협력해서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저 어두컴컴한 동굴로 들어가 몬스터를 잡아야한다는건데, 일단 마유즈미는 현실에서 사람을 대하는게 어려웠지만-물론 그는 사회 부적응자라든가, 방 구석 히키니트는 아니다-이 정도야 쉽다. 눈 딱 감고 30여분간 제 할 일을 하면 되는거다. 그 뿐인데...더 큰 문제는.


'파티가 안 구해져.'


던전 앞에 온 유저들은 대부분이 아는 사이거나, 혹은 유용한 클래스들끼리 뭉쳐져 파티를 맺고 던전에 들어가곤 했다. 마유즈미는 여기 와서야 자신의 클래스가 각광받지 못하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천민 클래스란걸 깨달았다. 어쩐지 마을에 현자가 적더니, 인터넷에서 현자 육성 가이드도 없더니 이런 것일 줄이야.


파티의 꽃 힐러 백마도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력한 마법을 쏘는 흑마법사도 아니며, 버프기의 신인 점성술사도 아니다. 같은 책 무기를 사용하지만 학자 클래스와는 또 계류가 다르다. 이 게임의 세세한 클래스 분류의 의도는 고전 판타지 RPG를 반영한 듯 싶어 좋았으나, 이렇게나 클래스가 많으면 분명 좋지 않은 클래스는 생기기 마련이다. 게임 시작 전에 '현자 상향좀요' 이런 글을 얼핏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 본거 같았다... 그 사람은 결국 접었을까. 마유즈미는 자신의 책을 껴안고 던전 앞 돌 위에 앉았다. 이틀간, 게임에 오래 접속해있어도 아무도 자신의 파티에 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파티에 들어가볼까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차거나, 딜량이 좋은 딜러를 구하거나 귀한 힐러를 구하곤 했다. 이도저도 아닌 하이브리드형 현자는 찬밥취급, 초보인 유저들도 모두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더러운 세상...게임도 똑같아.'


마유즈미는 스킬창을 열어서 그나마 쓸만한 스킬들이나 올려볼까 싶었지만 시프 계열들이 지닌 '은신'이 왜 자신의 스킬트리에 있는지 기함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그걸 올릴수 밖에 없었다. 진짜 이 클래스는 뭐야, 시프에 레인저, 힐러에 캐스터 등을 모두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고작 LV.15에서 과거의 자신에 대해 후회하게 되다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작한 게임에서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니 마유즈미는 열불이 나 어디에라도 대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않았지만.


"야, 우리 한명 비는데 저기 한명..."

"현자잖아, 걍 우리끼리 가도 됨."

"아 저거 안좋음? 그랭"


그런건 전체말 외치기가 아니라 파티말로 하라고, 이자식들아! 차라리 은신을 쓰고 어딘가 숨어있을까, 싶다가도 마음이 약해져 마유즈미는 다시 제 자리에 앉고 마는 것이었다. 돌 위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어, 자신도 돌이 될 거 같았다. ...그만하고 오늘도 끌까, 아니면 캐릭터 삭제를...


[파티원이 입장했습니다.]


'어라.'

"안녕하세요."

"던전 가는거죠?"

"...네, 뭐. 그런데 사람이 잘 안 구해져서."


파티원이 된 유저는 제쪽으로 다가온 듯 싶었다. 하아,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이냐. 머리 위에 있는 뿔은 뭔 캐시 장비라도 되는건지, 마유즈미로선 알 턱이 없었다. 얼핏 보이는 장비들로 봐서는 뭔 클래스인지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파티 정보창을 열어 그의 정보를 힐끗 읽었다.


EMPEROR-??? LV.15


???가 뭔데? 오류인가, 하고 눈을 씻어봐도 창의 그 문구는 그대로였다. 닉네임 옆에는 보통 클래스가 써져 있는데 이 사람은 아닌건가. 자신 옆으로 다가온 유저의 아바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 말이라도 붙여봐야 할 거 같아서 마유즈미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도 말 했지만 사람이 잘 안 구해져서요."

"그럼 둘이 가죠."

"...둘? 셋 쯤은 괜찮아도 둘은 무리일텐데, 저 곳."

"괜찮으니까."


사실 이건 부캐인건가?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둘이서도 된다.'라는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마유즈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으면 어쩔수 없는거지, 게임 지우면 되고. 먼저 가자는건 저쪽이고...


"...가 보죠. 엠페러 님."


거 참 닉네임도 유치하게 잘 지었네, 라며 마유즈미는 자신의 지팡이를 쥔 채로 던전 입장의 버튼을 눌렀다.


★★★


3분 24초.

아마 세계 신기록이 아닐까? 보통 30분이 정상이라고 하던데. 쓰지도 못하고 놔둔 포션들은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렸다. 마유즈미는 자신들이 함께 지나온 동굴 안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온통 까맣게 타버려 데이터 자체가 소멸된 거 같은 으스스한 광경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안 했다. 약 200초동안, 그저 걷고 달리기만 했는데 주변에서는 몬스터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는 이 유저는 숨 하나 가빠지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튕겼을 뿐, 무기도 하나도 없었다.

정체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클래스가 뭐야?"


중얼거리며 혼잣말 한 마유즈미의 말에 그는 마유즈미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조작했다. 흠칫, 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려는 마유즈미에게 예상외의 창이 떴다.


<EMPEROR 님 께서 친구 신청을 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 (N)>


"수락하시면 알려드릴게요."

"... ..."


초보자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마유즈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Y를 눌렀다. 텅 비어있던 친구창에 한명의 이름이 생겼다. 자신보다 조금 키가 작은 그 유저의 아바타는 던전을 나와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자신의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동 습득 시스템이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하나하나 몬스터들이 드랍하는 재료와 골드를 줍고 있을 뻔 했다.


"마왕이에요."

"...뭐?"

"마왕입니다. 아마 제 클래스를 읽지 못하신건 마(魔) 언어로 써져 있어서 그러실거 같습니다만."

"아니, 이봐. 홈페이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런 클래스는 못 봤어."


어이가 없다는 듯 마유즈미가 대꾸하자 상대방은 고개를 기울이며 마유즈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왕이라니, 거짓말일게 분명하잖아. 그런건 보통 게임 내에서 몬스터로 나오는 최종 보스지,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다.

...아니지?


"이 게임에는 수백가지 히든 클래스도 존재한다는데, 그게 아닐까요. 저는 처음 시작할때 이 클래스로 자동 전직되어 있었기에."


현실이라면 왜인지 도련님들이나 쓸 거 같은 말투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유즈미는 샅샅히 제 눈으로 상대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그가 투사 계열인지, 캐스터 계열인지 알 고 싶었다. 아까 쓴 뭔지 모를 스킬은 도대체 뭐였던거냐. 미지의 존재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럼 혼자 깰 수 있는데 왜 나랑 같이 파티 해서 들어간건데?"

"혼자 계속 있으시길래, 눈에 띄여서요. 어쨌든 깨셨으니 다음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겠네요. 마유유 님."


정중하게 인사한 뒤, 상대는 파티에서 탈퇴했다. 기다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유즈미는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시스템 보이스만 귓가에 울린 채로 마유즈미는 멍하니 서있었다.


"마왕이라니."


완전 치트키 아닌가? ...누구는 파티도 구하지 못해 이렇게 초반을 쩔쩔매고, 저렙 몬스터 한마리 잡는데에도 오래 걸리는데 마왕이라는 히든 클래스를 처음부터 가지고 시작한 녀석은 저렇게나 쉽게 게임을 하게 되다니.

정말로 인생은, 불공평했지만.


'...일단 다음 퀘스트나 하러 가자.'


그리고 퀘스트를 완료하러 NPC 앞으로 느적거리며 갔을때, 또 그 붉은 머리가 보이자 마유즈미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인파들 사이에서도 위로 솟은 한 쌍의 뿔은 눈에 띄여도 너무 띄였다.


"어이, 너."

"네."

"...다음꺼 같이 하러 갈래? 동선, 같아보이는데."

"그러죠."


마왕은 마왕으로 태어나지만, 누구나 LV.1의 시기는 있는거구나, 그런거라면 지금 나는 마왕의 걸음마 시절을 보는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마유즈미는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책 커버를 쓰다듬으며, 그와 함께 모험을 시작했다.



적먹 60분 전력 :[마왕과 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