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 가의 독자가 열 여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 겨울 날은, 몇 리 밖에서도 음악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크게 연회가 열렸다. 이 토지를 대대손손 이어 다스리고 있는 가문으로선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곳에는 아끼지 않고 돈을 부어 연회를 열였는데, 그만큼 손님들이 많이 오니 확실히 필요한 자리이긴 했다. 날씨가 추운 것도 모르게 잔뜩 불빛들이 켜지고, 고급 술들이 나오고, 고기들이 구워졌다. 가문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떠들썩할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 앞에 절을 하고, 선물을 건네는 열 다섯번째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가문정도야 알고 있다. ㅇㅇㅇㅇ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라며 하인의 손에 들려진 그 선물은 곧 아카시의 손짓에 따라 뒤쪽의 선물 더미에 더해졌다. 어차피 이 중에서 실제로 쓰일만한 선물은 몇 없을 것이다. 매년 그러했으므로. 그들은 딱히 아카시 세이쥬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가져온게 아니라, 아카시 가문에게 잘 보이려고 속히 말하자면 뇌물을 들고 온 것과 같았다. 생일이지만, 딱히 즐거운 날은 아녔다. 언제나처럼 적당한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끝날때 쯤이로군.
시간을 보니 식사도 했고, 자신이 먼저 들어가도 딱히 아버지가 뭐라 할 거 같진 않았다. 잔치는 길어지고, 취한 손님들이 많아지니 더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아카시가 방에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악사들과 무희들을 보다가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많이 움직이진 않았지만, 피로한 날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매년 그래왔다.
-아카시님.
그가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한 하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뒤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큰 주인님의 전언이라며 말을 이었다.
[믿을만한 가문에서 온 선물이더군, 신원이 보장되어 있는 하인이니 알아서 쓰거라. 너도 이제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하는 나이니.]
하인? 이라며 고개를 기울여보니 그 하인 뒤로 희멀건한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눈치채기 전까진 아예 있을 줄 몰랐는데, 자신보다 키가 큰 그 소년은 아카시의 앞에 와 천천히 절을 했다.
-마유즈미 치히로라고 합니다, 아카시 세이쥬로님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아첨하는 기색은 없었으며, 떨거나 두려워하는 느낌도 없었다. 아카시는 눈을 크게 떴다.
열 여섯번째 생일의, 열 여섯번째 선물은 그동안 받은 것과는 조금 다른 선물이었다. 고개를 들라 하고, 하인은 물린 뒤 그는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이 영지에 살던 집의 자식이었겠지. 희멀건 머리색과 탁한 눈색은 그의 잿빛 옷과 더불어 그를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하인이 아니라 암살자 쪽이 적성에 맞지 않을까, 라며 아카시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기척이 없는 하인이라니, 책에서나 나오지 않는가. 잘만 쓰면 득이 될 특징이긴 했다.
-몇 살이지?
-열 여덟입니다.
-그래...그래서 날 위해 무엇을 할 거지?
십 육년을 살아오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대략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두려워 하거나, 집안의 후광을 보며 떠받들거나, 멀리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선물은 셋 다 아닌거 같았다. 떠받들기에는 굽실거리는게 없었고, 두려워하는건 목소리만 봐도 아니었으며-물론 당당한 쪽도 아녔지만-, 멀리하는것도 아녔으니. 아카시는 그의 대답을 듣고 미소지었다. 장지문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4. ▶광음조 요괴AU 소설(전체연령가, 16p/2000\)
月
[아마노 자쿠라고 한다면, 만난 사람의 마음을 읽고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는 유명 요괴다. 우리코히메 설화에도 나오듯이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요괴일 것이지만, 딱히 그렇게까지 해를 끼치는 요괴는 아니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난 꾸러기 정도의 인식이겠다.
아마노 자쿠가 등장하는 우리코히메 설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으며, 학자들 또한 이 설화의 결말의 잔혹성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마유즈미 치히로는 책을 덮었다. 아래의 글을 읽는다면 또 괜히 제 양 손목이 저릿해져 올 거 같았다. 도서관은 조용했지만, 주말에도 불구하고 꽤나 사람들이 많아 그에게는 불편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고, 머릿속으로 시끄럽게 말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망할 인간들.'
필요하지 않은 정보가, 감각이, 감정이 쏟아 들어온다.
오늘의 점심 식사는? -내일 그 과장 녀석이 말을 건다면, 한방 먹여줄거야,- 손톱이 조금 깨졌네, -아아- 그 노래 정말 좋았지, -집에 가기 싫어.
모두 그의 것이 아닌 갖가지 생각들을 무시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뱉고 어서 이 자리를 뜨는 수 밖에 없다. 책을 읽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알았으니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어보여 그는 재빨리 문을 나섰다.
'소년만화에서도 쓰지 않을 거 같은 소재잖아.'
많은 사람들의 중첩되는 목소리가,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일 만큼 멀어져 그는 공원의 벤치에 자리잡아 털썩 앉았다. 불평을 해 보고, 자료를 찾아봤자 소용이 없다. 옛 자료들은 모두 아마노 자쿠에 대한 설화나, 그 의미에 대한 거 뿐이며 그가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선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
병원에 간다?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들립니다.' 라고 정신의학과에 가서 말해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게 뻔했다. 어딘가에 데려가져 뇌가 해부되지 않는다면 몰라. 그는 정신적으로는 멀쩡했다, 적어도 그는 19년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지, 정신병자는 스스로를 멀쩡하다고 믿을 수도...제기랄.'
초 여름의 교토 날씨는 아직 더워지지 않아서 좋고, 파아란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날에 그는 죽을 상을 하고 자신의 특이 체질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자니 우울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관찰하던 취미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부모님과 관련이 있을까? 무엇 하나도 확신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까지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설화의 아마노 자쿠처럼 자신이 남을 조종하게 된다면? 우리코히메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역할이 된다면? 자신의 결말이, 아마노 자쿠처럼 손목이-
'나는 아마노 자쿠가 아니야.'
마유즈미 치히로는 며칠 전 부터 제 손목 안쪽에 희미하게 드러난 문자-아마노 자쿠를 보며 스스로 되새겼다. 벌떡 일어나,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