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택배 시킨건 아무것도 없었다. 엊그제 왔었던 신작 라노베 두권이 그가 최대한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주문 물품들이었고, 그 외에도 자취하는 대학생인 평범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딱히 없다. 그러므로 마유즈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고개만 돌렸을 뿐 일어서지 않았다. 한가하게 니코니코생방송을 보던 중이었는데, 누가 방해하는건가. 딱 이 정도 생각만 들었다.

방문판매인가?


딩동, 딩동.


이번엔 두번. 꽤나 끈질기네. 방문판매가 아니라면 설문조사 같은건가. 아아, 그런거 관심 없다고. 날 냅둬. 세번째로 조금 더 다급한듯이 초인종이 울리자 할 수 없이 마유즈미는 일어서 문가로 다가갔다. 이럴바엔 빨리 거절하고 오는게 낫겠다고-


"아, 선배. 죄송합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아카시가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

현 라쿠잔의, 고등학교 이학년 농구부 주장이자 기적의 세대의 캡틴이었던.


"뭐야...?"


저녁이 지나 밤을 향해 달려가는 꽤나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추운 겨울이기도 했다. 밖에서 녀석을 내버려두는건 일단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마유즈미는 들어오라고 권했으나 아카시는 무언가 걸리는게 있는지 미적거리다가 좁은 신발장 앞에 주춤거리며 섰다.


은퇴식 이후로도 아주 가끔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친밀하게 지낸 것도, 지낼 이유도 없었다.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자 자취를 하게 된 마유즈미에게, 고등학교때의 그 기억들은 종종-과제를 할 때나, 레포트를 뽑거나 교수님의 지루한 강의를 듣고 있을때- 수면 위로 떠올라 탁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게 했다. 대학 농구 동아리에는 들어갔으나, 바빠져서 많이 참석하지도 못했고 여전히 자신은 이곳에서 존재감이 옅었고. 그의 세계가 회색이라면 그 때 만큼은 어딘가로부터 물들여진 색채가 있었던 시기였었다. 그것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그리워하는건 아녔지만.


그리고 그 색채는 붉은색이었지.


...이런,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마유즈미는 재빨리 흐트러진 방을 치웠다. 컴퓨터용 책상 하나, 컴퓨터, 협탁 하나, 일인용 매트리스, 가스레인지, 작은 냉장고, 한쪽에는 건조대와 옷장. 책장이 넘쳐 맨바닥에 올려 쌓여진 라노베들. 두 사람만 들어와도 가득차보이는 공간이었다. 굴러다니는 빈 과자 봉지를 책상 위로 치운 후에서야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추위로 인한 것이 아닌듯한, 붉은 뺨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만.


"방석은 없는데 어쩌냐."

"괜찮습니다."

"...그래서, 용건은?"


아카시는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리깐 눈, 밤거리를 적지 않은 시간동안 헤맨듯한 흐트러진 머리칼.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 그게 참 차가워보여서 마유즈미는 덥석 손을 잡았다. 여전히 굳은살이 있는 농구하는 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움찔, 하고 아카시가 눈에 띄게 반응했다. 예상대로 무척이나 차가웠다. 저녁 식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집이라도 나왔어? 라고 비꼬듯이 말하려다가 마유즈미는 말을 삼켰다. 선은 지켜야 할게 있어야 하는 법.


"일단은 갑자기 찾아뵈어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냐, 뭐. 별로. 한가했고."

"그리고..."

"뭐, 갑자기 연말에 나랑 니코니코생방송 보고 싶었나보지?"

"어..."

"아니면 노토토 아니메?"

"아니메 화가 되었다니 경축드릴 일이로군요."

"바닥에서 세번 굴렀다고."

"겨우 세번입니까."

"여긴 좁잖아. 마음 같아선 다섯번은 굴렀다고."


마유즈미는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또 다시 한번 더 그 붉은, 분명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뺨에 대해서 말하려다가 말았다. 길거리 다니다가 맞아올 녀석도 아니고, 뻔한 개연성인걸. 아카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답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은 좋은 선배가 아닌데, 다른 녀석들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고 충성을 바치는 쪽일텐데 왜 자기를 찾아온걸까. 궁금했지만 그냥 이대로 오랜만에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거 같아서. 마유즈미는 아카시보고 코트를 벗으라고 한 뒤에 그 코트를 받아 걸고 옷걸이로 다가가 말했다.


"연말에 갑자기 찾아온다면 미소녀 안드로이드 쪽이 좋았을텐데, 깜짝 이벤트로 이거도 나쁘지 않네."

"연락 드릴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만 죄송해도 된다고. 이미 여기 들어왔을때부터 넌 끝난거다. 지금 몇시냐? 11시? 고등학생은 잘 시간이잖아. 당장 저기 누워주겠어? 내가 집주인이니까 거부권은 없어, 참고로."


잘 자리를 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냉장고에 있던 캔 맥주 한캔을 꺼내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아, 일단 어쩌냐. 집에 용사에게 격퇴당해 빈사상태인듯한 마왕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야후에 물어봐도 답은 오지 않겠지. 맥주를 홀짝이다가 의자를 돌려 침대쪽을 보니 어느새 아카시는 색색 자고있다.


다시 물들여질 것 같다.

그와 가까이있다면, 그가 무슨 목적이든간에 -혹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도.



마유즈미는 일단 오늘, 맨 바닥에서 자게 될 자신의 허리에게 미안함을 표하고 스피커의 볼륨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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