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런 기대를 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건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을 보아하자면 한여름에 우비를 입고 거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캐롤을 부르라고 해도 부끄러워 할 일은 없을거라고 - 이건 좀 오버지. 애초에 그럴 일을 만들지 않을 사람이고. 마유즈미는 눈길을 아래로 점차 내리면서 멍하니 있었다.

자신이 정말 운이 좋긴 했구나, 아니면 봐준건가? 한정선착순으로 배포되었던 초판 라노베를 구했던 때보다, 진짜 더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왜지? 이건 그냥 남자 고등학생이 여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고! 넌 놀려줄 의무가 있...있...


"눈이 아래로 가네요, 선배."


침착하고도, 그러면서 차분한 연인의 목소리. 솔직히 말도안되고, 반쯤 장난으로 말해보았던 내기 소원을 들어줄 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게 첫번째 패인이다.


"말하지 마, 분위기 깨잖아."

"이런게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겁니까."


뭐냐, 그 비웃음. 당연히 있다고. 아카시 세이쥬로의 역사적인 링고땅 코스프레 순간인데 말야. 절대적이고도 무한하면서, 완벽한 자신의 승리 분위기지!


"미소가 평소같이 않으시네요."

"좋아서 입이 찢어지려는걸 자제하는거야."

"제 발쪽에 뭐가 있습니까?"

"발톱이 반투명하게 보이는 검은색 스타킹의 완벽함을 찬미하고 있어."

"... 눈 앞을 한 차원 아래로 보고 계시는거 아닙니까? 그런 기술까지 터득하신건지 참 신기한데요."


이 정도가 평소 두 사람의 대화방식이니, 뭐라 할 건 없겠지만 여전히 마유즈미 치히로는 자신의 최애캐 링고의 코스프레를 한 아카시를 꼼꼼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책을 읽는 평소보다, 자신을 보는 참으로 열렬한 그 눈길에 분홍색 가발을 쓴 붉은 연인은 옅은 한숨을 내뱉다가, 소파형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래서."

"음. 절대영역 재현까지 완벽...세라복 깃도...흠. 음."

"이걸로, 끝입니까?"


사진은 처음부터 아카시가 안된다고, 못박아놨으니 다시 졸라봤자 소용없다. 하긴, 녀석이 품행단정하시고 고귀하고도 높으신 도련님이란건 잘 아니까. 자신도 더 그럴 마음은 깨끗하게 접어놓았다. 이렇게 어울려주는 것만으로도 황홀하지. 사실 남들에게 보여줄 용도가 아니라 그저 마유즈미 혼자서 가끔씩 사진 폴더를 보며 좋아할 참이었지만, 뭐던 간에 아카시는 '그럼 평소의 저는 안 봐줄거잖아요.' 라면서.


맞는 말을 해댔으니.



-당연 농담이다.


"응?"


붉은 눈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러나 언제까지고 매력적인 시선이 웃고있었다. 홀려버린걸 알아챈걸까, 마유즈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아카시는 일어서서,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툭.


풀썩 소리가 심하게 날 정도로 밀어 눕혀져, 뒤의 침대에 파묻혔다. 힘 하나는 세다니까, 무게중심을 슬쩍 건들여 쓰러눕히는거겠지. 그걸 여기에 이렇게 쓰냐. 능수능란한 녀석-이라며 마유즈미가 혼자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아카시가 그의 위에 올라탄다. 아, 즐거워보인다. 역시 자신의 모습은 신경쓰지 않는거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주는건-


"[그러니까, '사과'를 보여줘서 신뢰를 얻을거야.]"


입고있던 자신의 세라복 리본을 어색하게 푼다.


어이, 어이. 그거냐. 설마 그거냐. 연극투는 아니지만, 대단한 주장님의 노력에 아찔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마유즈미는 누운 상태로 리본을 푸는 아카시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만화나 아니메속 여주인공들처럼 뽀얀 살이 바로 보이지도, 앞 섶이 바로 풀리지도 않았다. 마유즈미도 그정도야 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아래에 있는 자신이 코피가 날 것 같다는 사실은 그 어떤 작품속 상황 그 이상이었다. 머리쪽에 열이 치솟아서...


"...보여주지 않아도 믿..."

"재밌는 얼굴이네요, 선배."


가닥이 가느란 분홍 머리칼이 제 얼굴에, 붉은 볼에 슬쩍 닿다가 이내 목가를 간지럽힌다. 아, 얼굴에 반한건 아니지만 이렇게 볼수록 미형이고, 참 잘 짜인 얼굴이라고. 어떻게 꾸며도 녀석은 참 멋있다며 마유즈미는 한순간 둥실 마음을 띄웠다가 닿는 입술에 눈을 감으면서 슬그머니 그의 뒷 치맛자락에 손을 댔다. 미안, 링고땅... 아카시에게는 미안하지 않으니까! 이건 아카시니까!


"저만 생각해줘요."

"...가상한 노력이야."

"이미 선배 안에서 100퍼센트를 넘은것 아닙니까?"

"무, 무슨 논리인지..."


회색 앞머리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올리며, 내려보는 아카시는 웃는다. 누워있는 마유즈미의 시선이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으며 박동 수가 증가하고, 열이 올라갔으며 붉은 귀와 뺨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란건 이러한 관찰되고 측정될 수 있는 사항으로 알게된게 아니다. 그는 제 가발을 들어 벗고 다시 한번 키스한다. 어색하나마 그가, 반응해준다. 이게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아카시 세이쥬로의 온 몸이 마유즈미에게.

마유즈미 치히로의 모든 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반응하고, 기뻐하고, 흥분하는게.


"그냥, 압니다."


링고라는 가상의 안드로이드 캐릭터에게, 오늘만큼은 그나마 조금은 감사할 수 있겠다며 아카시는 제 치맛속을 감히 들어오려는 손을 슬그머니 쳐냈다.

'쿠로코의 농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먹적(黛赤)] 짝사랑  (0) 2014.12.29
[적먹적(赤黛赤)] 마법사와 제왕과 전쟁  (0) 2014.12.29
[적먹(赤黛)] 망상의 산물  (0) 2014.12.29
[적먹(赤黛)]Another  (0) 2014.12.29
[먹적(黛赤)] 가출  (0) 201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