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 소재 주의.


"... ..."

"... ..."


오해하지 마라, 난 지금 등산을 하다가 교토의 야생 곰을 본게 아니니까. 차라리 그 편이었으면 좋았겠다면서, 나는 사고를 정지하려는 머리를 겨우 굴려가면서 내가 본 거에 대해서 정리했다. 지금도 내 앞에 있는 '이녀석'에 대해서.


저 방 안의 인영은 아카시다. 아카시 세이쥬로, 일학년이자 라쿠잔의 농구부 주장. 나와는 어떠한 관계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관계, 이것까지 얘기하기에는 만화책 약 세권 분량정도가 나올 것 같으니 생략하도록 하자. 그래. 이 사람이 누군지는 파악했다. 물론 아카시의 모습을 본딴 악귀라던지 귀신일 가능성이 있으나 거울에 모습이 비치는 걸로 보아 아닌거 같다. 그의 앞에는 전신 거울이 있었다. 어두운 방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 문 밖의 빛이 들어와 똑똑히 보였다. 음. 이만 여기까지만 하면 안될까. 더 이상 묘사할 자신이 없다. 더 이상 나는 내가 본 것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하아, 현실도피는 그만두자. 아카시 세이쥬로는 치마를 입고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피스다.


점프의 그 유명한 소년 만화와 헷갈릴 사람은 없겠지. 그 '아카시 세이쥬로'님께서 '여성용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습니다만. 요약하자면 한문장이다. 나와 마주친 표정은 매우 놀란 표정인 것 같다.(이녀석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더 묘사하라고? 난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아카시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검은색이고, 머리에는 가발이 씌워져있다. 붙임머리일 수도 있겠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평소의 짧은 머리와 비교되어 상당히 낯설었다. 그냥 이러고 있는 아카시 자체가 낯설었다고 하면 안 되나? 난 이런 기행을 벌이는 사람은 2ch에서나 있을 법 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 앞에 그것도 가장 이런 짓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이러고 있다니 세상이 어딘가 잘못 돌아가고 있나 하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내일 곧 멸망해도 놀랍지 않아. 아카시의 모습을 본딴 외계인이라고 해도 차라리 이 쪽을 믿겠어.


결국 몇분이 지났을지 모를때에 나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아카시의 놀람 감정이 곧 살기로 바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모든걸 이해한다는 너그러운 연장자식 포용의 자세를 보여주자. 둘째, 나는 개미처럼 무해하다고 알려주자.


"그러니까, ...명가 자제분들 사이의 최신 유행인거지? 건강함을 기원한, 나도 들어본 것 같다."

"... ..."


아카시의 표정이 더 굳었다. 경보 제 1단계다.


"아니면 니챈 스레 앵커 벌칙...아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혹시 그럼 아카시의 숨겨진 쌍둥이 여동생이냐? 요즘 오토코노코 추세는 이란성 남매라고 하고 똑 닮은 캐릭터 둘이 나와 변장을 하고 페이크를 치고 다니는 그런 내용도 흔치 않게 있다. 네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준다면 나는 이 문을 닫고 돌아가겠다만...-"

"...됐습니다, 선배."


아카시는 다시 가면을 쓰듯이 표정을 정리하고, 가발을 확 손으로 잡아 끌러내렸다. 눌려있던 아래의 짧은 머리들이 뻗혀있었고, 아카시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까만 벨벳 원피스 아래에는 무릎, 그 아래에 있는 맨발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와 나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운동하는 남자 고등학생이니만큼 핏줄이 나와있는 다부져보이는 발이었다. 농구부 락커룸에서 볼 때와는 다른 느낌. 거기까지 보고 나는 문 밖으로 밀어졌다.


-


방에 들어가지 말걸 그랬나봅니다, 아카시 시오리씨. 평소에는 액자를 보고 이렇게 대화할 일이 없지만 오늘은 제 심신이 여러모로 폭풍에 시달린 것 같은 기분이니 이해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신다면... ...맏아들의 기행에 대해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릴 용기는 없습니다. 죄송해요. 나는 응접실의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멍한 눈으로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사진을 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카시의 어머니,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 나는 보면 볼수록 그녀가 현실적인 미인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젊었을때 돌아가신게 안타깝다고 생각되었으며 세번째로 느낀 가장 중요한것은 아카시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거였다. 첫째는 엄마를 닮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던데 그런건가. 단아하고 기품있게 웃고 있는 얼굴이 아주 가끔씩 드러나는 아카시의 미소와 겹쳐져 나는 몇번이나 눈을 깜빡거려야만 했다. 아카시가 여자였으면 저런 느낌이었을까-아니, 녀석은 조금 다른 느낌인걸. 애써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까의 장면을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한 2ch이라도 구경하려는 찰나,


"마유즈미 선배."

"...스레세우려고 한거 아니다. 믿어줘."

"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카시가 등 너머로 다가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옷차림과 머리는 보통때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아까 일에 대해서 물어봐야하나, 말아야하나 스스로 수십번을 고민했다. 녀석이 내게 '선'을 얼마나까지 허용해줬는지 나는 모른다.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 기괴한 옷차림은 아카시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으며 그냥 개인적인 취미일 수도 있고, 말 할수 없는 금기(이런게 현실에 있을 수 있냐 싶었지만 슈토쿠의 미도리마라는 선수는 거의 그정도로 강박증적인 습관이 있다고 한다)일 수도 있으니까. 나야 참견할게 아닌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있자 아카시는 손을 깍지끼고, 자연스럽게 제 무릎에 얹는다. 다리꼬지 마라, 무척이나 폼나니까. 내가 사장에게 면접받는 신입 사원이 된 거 같다고.


"제게 궁금한게 많으신거 같네요."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내게 배려심이 없다고 생각하나본데."

"저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호흡도요. ...이해하지 못한다, 기괴하다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죠."

"엠페러 아이를 이런데 쓰지 말아줄래?"

"궁금하다면, 물어보세요. 그게 권리입니다."

"무슨 권리?"

"그야, 제 연인으로서의."


책에서나 읽은듯한 대답. 하지만 녀석이 '말하기 싫다'라는 뉘앙스는 충분히 전해져 와 나는 물어볼 수 없었다. 대신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 차림으로 나와 데이트해줘."

"예?"

"아까의 그 차림으로, 나랑 밖에서 데이트 해 달라고."

"... ... 아니, 마유즈미 선배. 저는..."

"애인의 데이트 차림을 한번쯤은 선택할 수 있는거 아닌가? 권리를 주장하자면 나는 이런데에 하고싶은데. 난 아카시 세이쥬로와 데이트 하고싶다. 그리고 더해서 네가 치마를 입은 채로 하고싶다. 왜냐면-"


어쩌다 이렇게 된거냐, 마유즈미여.


"-끝내주게 예뻤으니까!"


안돼...이러지 마라... 내 입이여...뇌여... 제어에 따라 움직여주지 않는건, 큰 충격을 받아서인가. 진지하게 개 소리를 하는 내 면상을 그냥 아카시가 농담이 정말로 웃기시네요, 라며 쳐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아카시는 얼굴을 붉혔다. 그만, 그만해라. 귀까지 붉어지지 마! 이내 아카시가 얼굴을 숙이고 멋쩍은듯이 "네." 라고 말하자 나는 앞에 있는 유리 테이블에 얼굴을 쳐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싯가 50만엔짜리란걸 아니까, 포기하고 집에 가서 내 베개에다가 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래서 아카시와 데이트를 한다.

여장을 한 아카시랑 데이트를 합니다.

중요한건 아니지만 세번 강조로, 원피스를 입은 라쿠잔 고교 농구부 일학년 주장이자 기적의 세대 캡틴이었던 녀석과 제가 데이트를 합다고요. 저 맨 앞에 있는 수식어좀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이미 한번 질러버린 라노베는 환불할 수 없듯이 나도 내 말을 주워담을 수 있는게 아녔다. 나는 작동하지 않는 분수대에 앉아 아카시를 기다리며 또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2:58 PM. 슬슬 약속시간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사람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 쪽의 시내였고, 데이트 코스는 솔직히... 모르겠다. 적당히 서점이나 공원?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했다. 하루가 지났어도.


"-선배."

"... 왔냐."


내가 실수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까...아카시는 나름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었고, 어제 입었던 옷은 정말로 '한 벌 뿐인 원피스'로서 다른 여성복은 없는듯 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입은 것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제의 흑색 벨벳 원피스였고(길이도 무릎까지 오는) 신발은 운동화 차림에, 숄더백은 유명한 스포츠 로고가 박혀있는 흰색 백이었다. 한마디로 생각 이상으로 언밸런스했다. 아카시는 조용히 '공중 화장실에서 갈아입느라 늦었다'면서 내게 사과했고, 나는 겨우 정신차리고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 차림으로 데이트해줘' 라고 한 말에 맞게 온거긴 하다. 내가 그의 성향이나 추가적인 코디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뿐.


"어떱니까?"

"...어떠냐니."

"이상하지 않나요."


긴 가발을 쓴 침착한 아카시의 얼굴과 마주보고 있자니 이번엔 어제의 아카시 시오리씨가 겹쳐보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파카 안에 껴입은 가디건을 벗어, 아카시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그의 숄더백을 받아 메었다.


"가자, 세이코쨩."


차가운 손을 잡아 끌었다. 평소 아카시의 손은 이것보다 온도가 높았다. 몇번 잡아보지 못했었지만 나는 그걸 알았고, 한발 앞서 앞만 보고 가다가 나는 아카시가 어색하게 미소짓고 있다는걸 알았다. 이내 나는 아카시의 이 차림과 어제 응접실에서 본 아카시 시오리씨의 사진 중 하나를 연결해 볼 수 있었으며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이해하려고 하는건 아녔지만 상처주기는 싫었다. 마마콤이니 아노하나라든지(주: 죽어버린 여주인공의 옷차림을 따라하며 밤마다 돌아다니는 남자 조연 캐릭터가 있는 작품) 놀리고 비꼬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이 사항에 대해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데 그 이유였다. 내가 견뎌보지 못했을 슬픔을 그는 너무 어렸을적에 겪고, 지금까지도 품어왔을 것이다. 예상뿐이었지만.


-게다가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데 기행이라고 하지 않아도 되잖아.


사람이 있는 장소로 가자 아카시는 목소리때문인지 잘 입을 열지 않았다. 서점을 들러 내가 신간을 체크하고(사지는 않았다) 같이 농구화 매장에도 들러보고, 오락실에도 갔지만 옆에서 그저 가만히 있었을뿐 정말로 인형처럼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결국 내 쪽에서 이야기하는게 월등히 많아졌으며, 지나가던 사람들 몇명이 아카시를 돌아보긴 했으나 그건 옷차림문제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그래, 아직 미소년이라고 불릴 나이다 이거냐. 검은 옷을 하필 또 입어서 평소보다 작게 느껴진건 그저 착각이었을까. 저녁의 인파 속에서는 슬쩍 지나가는 커플들을 흉내내 팔짱을 껴보기도 했다. 아카시는 멋쩍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세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걸었다. 한 순간이지만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애는 누구지? 할 정도로. 아카시는 자신의 기운을 바꿀 수 있는 녀석이었다. 위엄있고 카리스마 있는 주장에서, 깍듯하고 예의바른 학교 회장. 반에서는 모범적인 학생. 자신의 존재감을 키울수도 줄일수도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을터였다. 지금도 그러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걷다가, 갑자기 옷깃이 잡아당겨졌다. 아카시?


"조심해, 미부치들."


그 말을 뒤로 아카시는 내 뒤에 숨듯이 달라붙었다. 뭐야, 뭐냐고.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앞에 세명의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자...잠깐만요. 이런 특수 이벤트는 거절입니다만. 위기일발이다. 곧 게임오버가 뜰 지도 몰라. 나는 허둥댔다.


"어머, 이런데에서 보다니 오랜만이네요. 밖으로 외출을 자주 할 거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난 저 눈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끝까지 그가 날 선배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안다. 나도 후배로 인정하지 않으니까-게다가 졸업도 해버렸으니 이젠 별 상관하지 않아.


"오해네, ...나올 일이 있었을 뿐이라고."

"뭐야, 마유즈미 선배! 뒤에 있는거 누구? 여친? 여친 사귀었어? 원래 있었어?"


까불대는 하야마의 말에 아카시가 더 달라붙듯이 얼굴을 내 등쪽에 파묻는다. 나는 낯을 가리는 여친을 지키는 리얼충처럼 팔을 올려 아카시의 어깨에 감쌌다. 아카시는 이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내 품에 안긴 상태다. 분명 어색해보였을 거다. 나름 나도 포커페이스라고 자신하지만.


"...상관할 거 없잖아. 그만 볼일 보러 가. 나도 일행이 있으니."

"헤에- 꽤나 미인같아보이는데. 그나저나 마유즈미씨도 선수네, 이런데에 재능있을 줄이야. 윈터컵때 혹시 응원 왔었어?"


아뇨, 코트에 계셨습니다만.

정확히는 너희랑 같이 뛰었지. 거기 있는 한명이 멱살도 잡았고 말이다. 멍청한 놈들아.


"가볼게. 그럼 이만."


눈치가 좋은 녀석이 있으니 어서 헤어지는게 급선무라 파악하고 나는 재빨리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아카시와 함께 뛰었다. 뛰다가 아카시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고 묻자 운동화, 라고 짧은 답이 돌아온다. 아카시가 오늘 신고 나온 운동화는 평소 연습때도 자주 신던 것중에 하나였다. 눈치가 재빠른 미부치라면 알 수도 있겠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


뛰다보니 언제 들어온지 모를 좁은 골목에서 둘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서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아카시의 가발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아카시의 머리께를 만지려다가 그의 입술을 만졌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보통과 같은 입술. 슬쩍 힘을 주자 입이 벌려지고 하얀 이빨이 보였다. 하아, 하고 내쉬는 아카시의 옅은 숨에 나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키스했다.

아카시는 내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내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는 감촉이 어색했다. 몇번이고 들이밀어 얽혀 급하게 키스하자 뇌에 산소가 부족한듯 상황판단이 어려워졌다만, 아카시가 그 어느때보다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고-아름답고-당당해보여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져서 어쩔 수 없었다. 겨우 한계쯤에 떨어지자 아카시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분명 이상한 말이겠지만...그리고 마유즈미 선배에게 미안해지지만..."


아카시는 숨을 고르며 무척이나 말을 느리게 했다. 나는 그 뒤에 나올 말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보고싶네요."


그건 아마도 그가 오년동안 한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보지 않았던 말이었을거라고, 나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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