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님께 커미션으로 받아 쓴 쿠로코의 농구 마유즈미 관련 커미션 3편입니다. 즐겁게 썼습니다.
마유즈미X드림주 4500자
마유즈미X드림주
자고로 발렌타인 데이라고 한다면, 나와는 관계없는 저 먼 세상의 일이었다. 그나마 관계있는걸 말해보자면 발렌타인 한정 가챠를 웹게임에서 뽑은 적도 있기야 하고…관심있는 작품의 발렌타인 한정 굿즈나, 리얼타임 게임속에서 발렌타인 한정 이벤트가 일어나는 정도려나. 그러니까, 보통 세간에서 통하는 '남녀가 사랑과 함께 초콜렛을 주고받는 행복한 러브의 발렌타인 데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쪽이 맞았겠다. 물론 마리와 사귀기 이전의 이야기니까 그것도 먼 옛날의 이야기려나. (라고 해봤자 내 나이가 20살도 채 안된다는게 지금 보니 우습긴 했다.)
두 달 전 쯤, 발렌타인 데이 날에 나는 귀여운 팬시 봉투에 담긴 마리로부터의 수제 초콜렛을 받았고 행복에 휩싸인 탓에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와락 껴안아 높이 들어올렸으며, (내려달라고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 상자 안의 초콜렛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강렬한 내 시선에 초콜렛이 녹았을거라고 혼자 망상하기도 했다) 사진을 수 차례 찍은 후에야 시식을 시도했다. 눈을 감은채로 음미하다가 나는 과장을 섞어서 반쯤 정신을 잃을 뻔 했으며, 나머지도 더 먹고 싶었지만 하루에 한 개씩만 먹자고 자신을 달래며 남은 2월을 달콤하게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만으로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사건은 꼭 일어나고야 만다.
사실 사건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내가 답지않게 조금 치졸했던 이야기이다. 때는 4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여느때와 같은 연습 후의 농구부실 안.
"마유즈미 선배! 선배! 선배! 마유즈미 선배!"
"… …."
이건 보통의 하야마를 대하는 내 태도이니 오해할 필요는 없다. 또 시덥잖은 얘기겠지, 하며 반쯤 무시하려는 찰나 핵폭탄이 떨어졌다.
"듣고 있는거 다 알거든! 으으음, 그러니까. 여친한테 초콜렛 맛있었다고 해줘! 완전 맛있었어! 짱 맛있었어!"
"얘, 하야마!"
"…코타로."
"에?"
다른 부원들이 황급히 하야마의 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내 청력은 멀쩡하니까. 짐을 싸던 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그가 뭐라고 말했던가. '초콜렛' '맛있었다.' '여친'
세개를 잘 조합해보면, 그러니까…맛있는 초콜렛 여자친구. 아니. 도피하지 말자. 하야마는 애인이 있는 거도 아니고, 굳이 저렇게 날 불러서 말하는 거였으니 나와 관계있는거겠지. 결국 그가 의미하는 건 '마리가 초콜렛을 자신에게 주었다.' 라는 걸로밖에 귀결되지 않는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 내가 어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내 등 뒤에서 내내 투닥대는 중이었다.
"야, 이 멍청아."
"내가 뭐 잘못했어?"
"코타로, 네 말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해. 그리고 전한다면 본인에게 전했어야지."
"그나저나 저 사람, 듣고 있는건가. 안 움직이는데."
"나 뭐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으이구, 이 화상아! 연애란걸 좀 해봐야 알지!"
레오는 멀뚱거리는 하야마를 쥐어박고, 아카시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재수없는 눈빛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팔짱을 낀 채로 주시하고 있었으며 네부야는 트림하면서 락커룸에 들어오다가 날 보고 한마디 했다. 등을 한대 짝! 치면서.
"어여, 마유즈미 선배. 여친한테 초콜렛 맛있었다고 해줘. 최고더라고. 사먹는거보다. 꺼윽."
…이제야 다시 한번 깨닫지만, 이녀석들은 10년이 지나도 연애에 대한건 알지 못할 멍청이들이다.
─
[미안,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마리.]
[마유즈미 선배, 많이 바쁘신가요? 부활동은 조심히 잘 하셨나요. 내일 뵈어요.]
[너도.]
─내일도 아마 바쁠 예정이야, 라고 매몰찬 답을 보내고 싶은걸 꾹 참고 나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거짓말을 했다. 딱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진 않는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녀와 있다면, 또 뭔 말을 해버릴 지 모르겠고. 혹시 나답지 않게 화라도 내버리면 큰일이니까.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집까지 버스를 타고 멍하니 가다가 까페에나 혼자 들릴까 하다가, 그냥 바로 곧장 집에 가기로 했다. 왜인지 그녀와 함께가 아닌 하교길은 쓸쓸했다. 오랜만이네, 이런 감각.
집에 와 내 방 침대에 털썩 누워서야 겨우 멈춰있던 사고를 시작했다.
그녀가 누구에게 초콜렛을 주는건, 물론 자유이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고, 연인은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 구속을 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것도 잘 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그날 그렇게나 기뻐했고, 자신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받은 선물인 줄 알았는데 그 녀석들도 받았다니 넓지 못한 마음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우스워라, 마유즈미 치히로. '유일성'이 침범받았다는 이유로. 착각한건 나였을텐데.
아아, 결코 그녀를 나쁜 사람을 만들거나, 미워할 생각은 없어.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초콜렛을 준 거에 대해서 마음 넓지 못하게 질투하는 자신'이 싫은 것이다. 이건 그러니까 그런거잖아, 남편의 직장 상사들에게 명절 선물을 돌리는, 그런거─ 그렇게 생각해봐도 부활동은 비즈니스도 아니고, 녀석들은 농구부원이기 이전에 같은 라쿠잔 학생이기도 하고. 또 질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저번에 그들과 함께 서있던 마리를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던 때를 어렴풋이 떠올린다. 시간이 지나고 그 감정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즐거운 것보단, 슬프고 괴롭고 찝찝한 무채색의 감정이 더 오래 남으니까.
일어서서 발렌타인 데이때 받았던 선물 상자와 봉투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 잘 놓여져 있는 상자를 열어, 희미하게 남아있는 초콜렛의 향을 맡는다. 작은 카드도 있었지. '해피 발렌타인. 좋아해요, 마유즈미 선배.' 나는 입술을 그 카드에 맞대었다가 땠다. 아무래도 내일도, 마리의 얼굴을 볼 자신이 나지 않는다. 이런 얼굴로는, 마음으로는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질투하는 남자는 추하다는걸 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안, 마유즈미 선배. 사실 우리 넷 다 받았어. 안의 필링도 모두 달랐던데, 마리쨩이 아주 신경써서 만들어줬던 모양… …어머, 이거도 말실수인가?'
'잘 먹었다고 직접 나도 선물과 함께 보답하려고 했어. 알아보던 중이었지. 좋은 연인을 두었다고 생각해.'
칭찬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넷 중에 나은 녀석은 한명도 없다는게 우스울 정도였다. 남의 연인이라는걸 좀 자각 하라고! 초콜렛을 먹고 조용히 있지 못했던 너희가 나빠!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이내 다시 들어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지만.
─
"…어라라, 저기 마리쨩 아냐?"
"오, 마리다! 마리! 잘 먹었다고 마유즈미선배한테 전해달라고 했는데! 들었어? 듣고 온건가?"
"저기…안녕하세요. 마유즈미, 선배는?"
이젠 조금 낯익은, 키 큰 두 인영에게 겁먹지 않고 마리는 그들의 페이스에 휘말리기 이전에 본론을 꺼냈다. 서 있는 곳은 체육관 문 앞. 시간은 부활동이 슬슬 끝날 때이다. 마리는 핸드폰을 꼭 들고 고개를 들이밀어 체육관 안쪽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아 한숨을 푸욱, 아무래도 마유즈미는 먼저 갔나보다. 연락도 하지 않은 채라니 걱정에 휩싸여 평소라면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사람, 오늘 연습 끝나자마자 잽싸게 나가버리던걸… 그러고보니 마리쨩, 어제 마유즈미 선배랑 뭔 일 없었어? 그게. 우리들이 말 실수를 해서 말이야. 정확히는 하야마녀석이."
"네? 아뇨, 어제는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맘도 참 좁기도 하지, 그게 말이지. 발렌타인데이때 우리에게도 마리쨩이 초콜렛, 줬잖아? 그거. 마유즈미 선배가 알게되어서."
"난 아직도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니까, 레오누님?"
"좀 입 다물어라, 화상아."
"선배가 말인가요?"
"마리쨩도 사실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 마유즈미 선배가 어제도 오늘도 마리쨩을 만나고 있지 않은데."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마리를 보며 레오는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부야가 어느새 다가와 마유즈미 선배가 초콜렛을 사실 혼자 다 먹고 싶었던거 아니냐고 묻자 그 손을 머리에서 떼고 네부야의 등짝을 한대 쳐주긴 했지만.('그 인간이 너 같이 돼지고릴라인줄 아니? 그만좀 먹어!')
"걱정 마, 마리쨩을 좋아해서 그러는거니까. 그러니까…사랑에 빠진 남자의 질투인거겠지."
레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리는 고개를 올려 속눈썹이 긴, 웃음으로 휜 눈을 마주보았다. 반응은 그녀 대신 다른 둘이 해주었다.
"헤에. 그렇게 누구보다 쿨해보여도 마유즈미 선배가 질투라니. 웃기기도 하다!"
"야, 여긴 웃을 포인트 아니거든?"
"역시 초콜렛을 엄청 좋아해서 그런가. 스위츠 취향."
"아니, 네부야. 초콜렛에게 질투 하는거도 아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뭐라 말해야 할지 입을 열지 못하는 마리를 보고 다시 레오가 다가와 허리 숙여 말했다. 멋진 초콜렛을 선사해줬던 마리쨩이 잘못한건 없어. 그 사람도 아마 자신에게 후회하고 있을걸. 분명 이런일로 헤어지자고 하거나, 싫어하게 될리가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면야 속 좁은 인간이니 내게 데려오면 때려줄거라고? 여자의 적이니까! 정 걱정되면 마리쨩이 먼저 말 걸어보는거도 나쁘지 않아. 마리쨩에게 화 낼 인간이 아니란거 잘 알잖니?
안심 시켜주는 그 말에 겨우 조금이나마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를 보며 셋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부야도 하야마도 한번 더 초콜렛에 대한 감사 인사를 장난스레 전했고, 농구부 관련 업무를 보다가 늦게 나온 아카시는 방금까지 뭔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안다는 투로 '인사는 다음에 건네야겠어.' 라고 말해 세 명의 경악어린 시선을 또 받았다.
"아아, 내년엔 우리 못 받는건가."
"한번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얘좀 봐. 염치 없게. 여친을 사귀거나 그냥 사먹으라구!"
"쩝, 여자애한테 받아서 좋았는데."
"마유즈미 선배 있었으면 너 그 말 진짜 폭탄이었어."
"하하, 다들 귀가해야지."
─
오늘도 결국 혼자 귀가해, 암흑의 구렁텅이에 스스로를 빠뜨리는게 취미가 되어버린 마유즈미씨입니다. 이 상태가 오래가지 않아야 할텐데, 스스로의 상태를 아직도 잘 가늠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일은 볼 수 있을까.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하지. 마음 잘 추스리자…라며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찰나 초인종이 한번 울렸다. 누구지. 방문판매원이라면 질색이지만. 가만히 계속 누워있는데도 초인종이 또 울려 툴툴대면서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건, 방문판매원도 택배원도 아닌.
"─…어, 마리?"
"마유즈미 선배."
후드와 교복 그대로의 차림인 마리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뛰어왔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정작 마주하니 아까까지 혼자 고민하던 일은 날아가고, 그녀에 대한 걱정만 생겨서 손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하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 가쁜 숨을 섞어가며, 예상 외의 말을 단호하게.
"내년, 발렌타인 데이에는 선배에게만… 지난 번보다 더 대단한 초콜렛을, 만들어드릴게요."
"… …어?"
"선배에게만…! 만들어 드릴테니까요. 마유즈미 선배께만. 절대로."
"으으음?"
잠시동안의 침묵 사이에서 눈이 마주친다, 잡은 손이 이내 따뜻해진다. 땀에 조금 젖은걸 눈치챈다. 속 좁은 자신에 대한 괴로움도, 자책도 사라진다. 지금껏 왜 옹졸하게 먼저 말 걸지 못했던가. 문자 메일 한통 보내지 못하고. 말로 뭐라 하기엔 서투르니까 역시, 꼭 끌어안았다. 이틀간 만나지 못했던 그녀가 다시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깟 초콜렛이 뭐라고, 아니. 마리가 준건데 그깟이 아니지. 다른 녀석들이 받았다는게 뭐 어때서.
그녀가 내게 준 초콜렛은 그 누구도 받지 못한, 나만을 위한 것. 내가 답례로 건냈던 화이트데이 선물도 오직 그녀를 위한 것. 정답을 알고서도 스스로 뒤돌아 있던 기분.
아니, 가끔은 연상답지않게 이렇게 조금 질투도 해 보자. 나름의 응석도 조금 부려보자. 한번만.
"…약속."
"네."
"올해의 두배로. 아니, 같이 만드는건 어때."
"그거도 좋다고 생각해요…으."
"미안, 미안. 숨막히지."
"아뇨. 네. 괜찮으니까요."
분명 발렌타인은 한참 전에 지났을텐데 마리를 끌어 안은 채로, 어디선가 달콤한 내음이 났다. 끝나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라쿠잔X드림주(마유즈미X드림주 베이스) 6500자
라쿠잔X드림주(마유즈미X드림주 베이스)
"아, 그거 알아? 마유즈미 선배. 애인 생겼대!"
샤워실에서 나와 물기를 닦던 하야마가 재밌다는듯 툭 내뱉은 말에, 연습 후 락커룸의 라쿠잔 레귤러(마유즈미를 제외한)들은 다음에 이을 말을 딱히 찾지 못했다. 그게 어쨌다는건데? 의 눈빛도 있었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 하나, 그리고 그나마 받아쳐주는 사람 한명.
"이번엔 어떤 소설이라는데?"
마유즈미 치히로가 서브 컬쳐에 관심이 있다는건 사실이고, 그와 시간을 보낸 몇몇 사람들이라면 쉬는 때에 그의 손에서 라이트 노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걸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아카시가 반쯤 장난으로 내뱉은 저 말은 개그로서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말이었으나 만약 마유즈미가 곁에 있었다면 잔뜩 태클을 받았을만한 그런 말이었다. 하야마는 아카시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결국 모를 말에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직도 홀로 신난채로.
"진짜야! 우리 학교 학생이라니까?"
"...나도 사실 세이쨩처럼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진짜라고?"
"응, 응! 2학년이래! 얼마 전에 같이 가는걸 봐서 물어봤더니 애인이라고 하지 뭐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 사람, 고양이 과는 아녔잖아."
"개 과도 아니거든?"
"아무튼, 여자친구. 엄청 귀여웠어!"
"코타로의 눈은 믿을 수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인걸."
"어머, 귀여운 아이가 타입이었구나, 처음 알았는걸."
"여자친구는 안 만들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배고프다."
"궁금하지? 궁금하지? 어떤 애가 마유즈미 선배하고 사귀는지 궁금하지? 다음에 여기로 오지 않으려나? 한번쯤 여기 들릴 만도 한데!"
그 뒤로도 넷은 어찌저찌 '환상종 마유즈미씨의 여자친구는 어떠한 사람일까' 라는 주제로 조용한 토론(하야마만 빼고)을 벌였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야마도 자세히 본건 아닌 듯 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니까, 언젠간 보게 되어 대화를 할 수 있을 때가 오지 않을까. 거기서 대화는 끊기고 모두들 하교하기 위해 교문을 나섰다. 남자 고교생은 한창 이성에 관심 있을 나이다. 그건 이 넷에게도 아주 적용되지 않는 사항은 아녔다.
의외로, 그 여자친구씨와 대화할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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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부치 레오의 경우]
"저기...저기요."
언제나와 같이 연습하다가 한번 둘러보고 있는데, 우리 1군 농구부원들이 쓰는 체육관 문 앞에 먹색 후드를 쓰고 있는 누군가가 보여서 다가가보았다. 손님이려나. 키가 작은 여자아이-여자아이들은 애초에 많이 들르지 않는 곳인데, 가끔 이럴 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여자아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운지 조금 굳은 채로 문에 손을 대고 반쯤 기대어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귀여워라, 작은 소동물 같았다. 강아지? 고양이? 토끼가 어울릴지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왜인지 좋아졌다. 가끔 이런 존재들이 있다, 사랑스러워보이는 존재들.
"작은 아가씨, 누구 찾아?"
"!... 저, 어, 마, 마..."
온 몸을 꼬며 안 그래도 떨리는 말 소리가 더 작아지고, 곧 도망가기라도 할 거 같아 나는 무릎을 숙였다. 이러면 눈을 볼 수 있겠지, 하고 시선이 한번 마주치자 안심하라는 듯이 빙긋 웃어주었다. 내 미모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먹힌다는건 아니까, 이름모를 여자애의 떨리는 큰 눈은 맑고, 투명해보였다. 꽤나 미인이네- 내 이런 자세에 조금 안심했는지 여자애는 다시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바르르 떨리는게 보여 나는 토끼양이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후우, 우...마유즈미 선배를, 찾고, 있...어...요."
"어머, 마유즈미 선배? 오늘 연습 왔긴 했는데 잠시 세...아니, 캡틴하고 감독하고 대화중인거 같은걸~ 금방 안 끝날 거 같지만. 안보여서 걱정했니?"
내가 친절하게 내뱉은 말에, 여자아이의 작은 고개가 겨우 느릿하게 끄덕여진다. 내가 문 앞에서 이러고 있는걸 하야마녀석이 봤는지, 혹은 날 찾고 있었던건지 잽싸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레오누님, 뭐해? 또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토끼양의 몸이 눈에 띄일정도로 떨렸다. 한 발자국은 이미 뒷걸음질 친 상태. 저런 시끄러운 녀석이 오면 누구라도 도망가고 싶겠지~ 하며 뒤돌아 하야마에게 주의를 주었다.
"얘, 손님 앞에선 시끄럽게...-"
"어, 어라? 너 마유즈미 선배 여자친구 맞지? 맞지?"
주의를 주기도 전에 녀석은 내 앞에 끼어들어 여자아이의 손을 덥썩 잡는다. 여자친구였구나. 그보다 머리가 아파져온다. 도망간다고, 네가 갑자기 그러면! 여자아이는 얼음이라도 된 듯이 하야마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기계처럼 끄덕거린다. 어, 어떻게...아세요? 하는 말에 하야마는 또 제멋대로 떠든다. 저번에 둘이 같이 가는거 봤어! 선배한테 나중에 물어보니까 여자친구라고 해서, 응. 진짜 맞았구나! 귀여워! 작아! 마유즈미 선배 찾으러 온 거야? 난 하야마 코타로! 이학년! 농구부 1군이야!
하야마의 재잘거림에 여자아이의 떨림이 조금 멎어보여서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저 녀석, 의도는 안해도 좋은 쪽으로 된거 같으니까 냅둬도 되려나... 슬슬 데리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여자애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올라서 좀 더 여기 있기로 했다. 어차피 연습 거의 다 끝났고.
"이쪽은 레오누님! 저기서 오는건 에이쨩! 그리고 어...아카시도 오네? 안녕! 마유즈미 선배는?"
"어머, 세이쨩."
"안녕. 그쪽은?"
"마, 마, 마리라고 합니다! 아카시 세이쥬로 군인가요. 마유즈미 선배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여자아이는- 이제 마리쨩이라고 부르자-나오는 세이쨩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하다가, 후드가 벗겨졌다. 길지 않은 하늘색 머리가 나풀거리며 쏟아진다. 얘기를 들었다, 라는 그 한마디로도 세이쨩은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반가워. 그리고 어쩌지, 치히로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맡겨두고 온 상태라...기다리는 중인건가. 괜찮다면 우리가 상대해주는건 어때?"
"네?"
"에이키치, 코타로, 레오. 부탁해. 연습은 다 끝났지?"
"어? 거의..."
세이쨩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꾸미는 듯한 표정이다. 이런 표정을 짓는 세이쨩은 조금 알 수가 없지만...뭐, 나쁜 일은 아닌거 같고. 마리쨩은 귀여워보이니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다. 나는 짐짓 짜증내는 척 하며 대꾸했다.
"아직 땀투성이니까 적어도 씻고 오겐 해줘, 이런 상태로 여자아이와 대화하는건 실례라고?"
"아아. 그러지. 네 의견은 어때? 괜찮을까. 마리. 같이 음료수 한 잔이라도. 아니면 간식시간인데 매점이라도 가지."
"네? 어...음...으음."
아까 '상대해주겠다' 라는 말에는 한 발자국 또 물러서더니 아카시가 '대접하겠다.' 라고 말하자 곧바로 망설임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쓴걸까, 가끔 저렇게 사람을 휘어잡는 세이쨩은 무섭기도 하고 말야- 네부야와 하야마 녀석은 아무 생각 없는지 내 손을 잡아 끌어 어서 샤워실로 가자고, 소리쳤다.
"아카시! 난 빵 사줘!"
"난 아이스크림!"
하여간 잿밥에 더 관심있는 녀석들이라니까, 씻고 나서 적어도 스킨과 로션은 바르고 나와야겠다며 나는 아카시와 마주 서 있는 마리쨩에게 한번 더 눈길을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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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코타로의 경우]
그으러니까아, 그러니까! 나와 레오누님은 우리 앞에서 열심히 먹고 있는 두명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 두명이라 함은, 짜자잔. 다름 아닌 에이쨩과 마리쨩이다. 에이쨩은 그렇다고 해도, 마리쨩은 의외였지. 매점에 우리를 데려온 아카시가 간식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자 빵 세개에, 과자 하나에, 푸딩 두개. 음료수 세캔을 가져온건 다름아닌 마리쨩이었다. 그거도 품 안 가득히 들고 있어서 나와 레오 누님은 입을 딱 벌렸다. 조그마하다고 생각해서, 여자애들은 이슬만큼 먹고 살 거 같았는데 말야! (물론 우리 집의 큰누나 작은누나 둘은 여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에이쨩은 언제나처럼 레토르트 햄버거 여러개에, 주먹밥, 빵과 과자 등 그 나름대로 한가득 집어들었다. 양심은 좀 있었는지 아카시에게 반 값정돈 자기가 내겠다고 하자 아카시가 '됐어.' 라고 쿨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에 빵 하나. 레오 누님은 음료수에 푸딩 하나다. 아카시는 ...녹차 캔 하나. 정말 언제나 봐도 애늙은이 같은 애다. 일학년 주제에! 그게 더 잘 어울리는게 이상하지 않아? 마리쨩은 아카시의 녹차캔을 보고 자신의 빵 하나를 건네주려고 했다가 아카시가 웃으며 괜찮다고 하자 다시 조심스레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정말 다 먹을 수 있겠어, 마리쨩? 무리하지 않아도..."
매점의 옆쪽,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에 앉은 우리 넷은 마리쨩을 바라보았다. 마리쨩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카시를 향해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봉지를 띁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느리지도 않게, 음식을 먹는다... 먹는다. 먹는다! 신기하다!
"우와..."
"남 먹는거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거 아니야, 하야마."
"그럼 에이쨩 볼래."
"쟨 보면 더 잘 먹을걸."
마리쨩의 옆에 앉은 에이쨩을 보자 그는 벌써 반쯤 빈 봉지로 만든 상태다. 저러고 또 트름을 하겠지. 여자애 앞에선 좀 안 해 줬으면 할텐데 말이다! 열심히 먹는 둘을 구경하다가 아카시는 적당히 대화를 주도해 나갔고, 우리는 맞장구치면서 기묘한 간식시간을 계속해나갔다.
"천천히 먹어, 마리."
"고맙습니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 마리쨩~ 케이크도 좋아해?"
"네, 네에. 좋아해요... 쵸코도, 생크림도."
"후훗, 다음에 내가 아는 까페 같이 가보면 좋겠다. 생각 있으면 언제나 와줘."
"뭐야, 레오 누님. 임자있는 여자애한테 작업중?"
"작업이라니, 귀여운 애와 까페 간다는게 나빴니?"
"너 왜 저번에 나랑은 안간댔냐."
"너 같은 녀석하고 케이크 까페를 내가 가겠니, 제정신이게?"
우리의 분위기를 살피면서도, 마리쨩은 열심히 먹었고 음료수도 엄청 많이 마셨다. 중간에는 음료수가 모자랄 지경이라, 에이쨩이 자기 것 하나를 건냈더니 꾸벅 인사하면서도 엄청 기분이 좋아보였다. 조용하긴 해도 표정에서 드러날 정도로. 으음, 왜인지 마유즈미 선배랑 닮은거 같단 말야.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 매번 무뚝뚝해보이는 표정이긴 해도 아주 가끔씩, 저렇게 드러낼때가 있다. 본인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거 같지만. 나는 턱을 괴고 반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래서, 치히로의 어디가 좋아?"
아카시의 장난섞인 질문에 마리쨩이 갑자기 콜록거렸다. 사래가 들린 듯 했지만 이내 괜찮다고 하고 다시 멀쩡히 식사모드에 들어가는 걸 보며 레오누님은 건냈던 냅킨을 다시 집어들었다. 남은 크림 빵을 두어입 더 먹고 나서 삼킨 후,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면서 마리는 말했다.
"...다요."
"응?"
"마유즈미 선배, 자상하시고...잘생겼고요, 성격도 좋고. 부족한 점도 없으시고요. 서, 선배때문에 라쿠잔에 왔으니까요! 옆에 있으면...안정감이 들어요."
열렬한 사랑 고백에 입을 벌리는 우리를 보며 마리쨩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곰곰히 생각하다가, 우유를 한입 마신 후 말했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마유즈미 선배는 완벽하다고 생각하시지...않나요?"
나와 다른 셋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모르는 마유즈미가 농구부에 또 있나?' 미안, 마유즈미씨. 대체로 우리쪽에서 당신 취급은 이렇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여자친구가 사귀고 싶어졌다. 마리쨩보다 더 귀여운 애로. 찾기 힘들거 같지만 어찌 안되려나- 으응- 일단 결승전 끝나면 더 생각해보자. 지금은 농구가 더 좋으니까!
-
[아카시 세이쥬로의 경우]
셋은 간식을 먹은 뒤에 모두 돌아갔다. 마리와는, 아직도 함께 체육관 밖 벤치에 앉아있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가운데에 한사람이 들어갈 정도. 치히로는 슬슬 특훈이 끝날 무렵일 것이다. 그가 나올때까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쓰고 있어도 느껴지겠지.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본다.
"닮았네."
"네?"
"그와."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못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살짝, 아주 옅게 웃고 다시 고개를 돌려 무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받아들인건 아마 연인과 닮은점이 있다는 칭찬쪽이려나. 나는 그저 '존재감이 크지 않고, 조용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기에' 내가 교내 안에서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쪽으로 말한 것이다.
사실 알아차리지 않아도 괜찮다. 부원의 연애는 사실 원치 않는 쪽이지만-농구에 집중하지 못하므로- 아까 특훈 시작때 보니 여전히 초반과 그 기세는 달라지지 않았고. 떼어놓거나 그럴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다. 이런걸 간섭한다면 반발심도 클테고.
"연애, 즐거워보이네."
"...네."
"앞으로도 치히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라."
둘만 남으니 꽤나 대화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지만, 아까도 사실 떠드는건 나머지 셋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이 정도면 파악할 거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냈다. 음? 하고 궁금해하는듯해 나는 손가락으로 내 입 옆가를 가리켰다. 겨우 시선이 마주친다.
"빵조각, 묻어있어."
"아, 아까 닦았는데..."
허둥지둥 슥슥 닦아내는 그녀를 보자 웃음이 나올뻔 하지만 참았다. 고마워요, 하며 돌려주고 그녀와는 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몇분 뒤에나 아카시 군은, 하고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마유즈미 선배가 말해준 거 보다 훨씬 친절해보여서...오늘 간식도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꼭 보답할테니까요."
"치히로의 입에서 내가 나왔다니, 어떤 얘기였을지 궁금한데. 보답은 괜찮아. 농구부에 손님은 자주 안 오고."
시계를 보니 치히로가 나오기 1분 전. 나는 일어섰다. 다음번에 만나면 편히 불러도 괜찮아.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입가에 묻었다는건, 거짓말이었다는거 결국 알아채지 못했구나. 그 편이 좋았다.
-
[마유즈미 치히로의 경우]
"...하아, 내가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 안 해 온게 잘못이었지. 마리. 미안하다."
"아뇨! 선배, 괜찮아요. 그리고 정말 다른 분 들이 잘해주셔서..."
"다음부터는-."
겨우 함께 귀가중. 나는 날 한참동안 기다렸다는 마리를 향해 단호하게 내뱉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위험하고 제멋대로인 녀석들 앞에서 마리가 얼마나 떨었을까.(마리가 초면인 사람과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 정도야 아니까) 게다가 NTR 전개가 펼쳐질 지도 모른다고? 그런 비현실적이고 미연시적인 가능성도 아주 예상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그보다, 녀석들이 잘 대해 줬다니 오히려 더 찜찜하고 말이지. 오늘 특훈을 늦게까지 시킨 아카시가 나빴다. 어차피 나는 제대로 반항할 생각도 없지만. 귀찮으니까. 이런건 오늘 하루뿐이었고.
"-다음부터는 여기 와도 다른 녀석들과 대화 금지."
"하지만, 그래도."
"안 돼. 기다리는건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그리고 오늘 뭐? 아카시가 먹을 걸 사줘서?"
나답지 않게 약간 언성이 높아지자 마리가 풀죽은듯이 시선을 내린다. 금새 미안해져 나는 달래듯이 손을 잡는다. 하지만, 녀석들과 대화했다니 왜인지 싫은걸... 마리가 잡은 손을 꼬물락거렸다. 진심은 말하지 않지만, 마리도 알거라고 생각했다.
"...많이 잘 먹었냐?"
"엄청 잘 먹었어요."
"다행이군그래, 다음에 만나면 또 잔뜩 아카시의 지갑을 띁어먹어라. 그땐 나도 꼭 그자리에 있어야겠다."
"좋은 분이셨는데, 다들."
짐짓 또 화난 표정을 지어보자 마리가 조용히 웃는다. 미안해요, 마유즈미 선배. 미안할건 나였는데도 그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어져서 말문이 막힌다.
"아냐, 가자. 내일은 오랜만에 방과후 데이트하자. 농구부 연습, 빼준댔으니까."
"... ...앗, 정말요?"
"같이 서점 갈래? 체크하지 못한 신작, 많이 나왔고. 오면서 맛있는거도 먹고."
잡은 두 손을 들어올려 슬쩍 내 볼가로 옮겼다가, 그다음 후드가 내려진 마리의 볼쪽으로 옮겨 부빈다. 몇번 쓰담지도 않았는데도 마리의 볼이 붉어진다.
다른 사람과는 얘기하지 말아줘.
솔직하지 못한만큼, 좋아해. 조금 말이지, 매번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작품 속 얀데레를 이번만큼은 옹호하고 너를 하루정돈 가두고 싶을 정도로.
... ...가둬봤자 같이 책을 읽고, 콘솔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우리들이지만 말이다.
아카시X드림주X마유즈미, 5500자
아카시X드림주X마유즈미
"장기는, 혹시 둘 줄 알아?"
그녀는 여전히 나와 고개를 마주치지 않는 상태이다. 상대에 대한 비호감이나, 그런 것 보다는 이제는 그 자세가─어찌보면 처음부터 내게는 일관적이긴 했다만. 더 알기 쉬워졌다고 해야하나─ 그녀의 성격중 하나일거라고. 아마도 진짜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건 연인에게, 그 사람 한 명에게 뿐이겠지.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 들이는 사람에게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신뢰의 영역일까. 나는 아직 그녀의 신뢰 안에 들어가기엔 멀었다는걸 실감한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있던 그 상태로 조용하게 중얼거리듯, 말한다. 나를 향해서 말하는 거 같지 않는 허공에 흩뿌려지는 짧은 음절들을 주의깊게 새겨듣는다. 그 음절 사이에 그녀가 있다.
"아뇨…."
"장기는 이제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건 알고 있어. 더욱이, 우리 나이대라면 모르는게 당연시될지도. 그렇다면 혹시 체스는 알아?"
우리가 현재 마주보고 앉아 있는 곳은 빈 학생회실. 애초에 이곳은 학생회의가 있는 날이나 특별한 사안이 있는 날이 아니라면 텅 비어있는 상태이다. 출입의 허락은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지만, 학생회장의 특권이라면 이런 사적인 일에 적당히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문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나는 한순간 그녀를 매점으로 데려가는게 맞았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오랜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 쪽이 낫다는 결론을 빠르게 내렸다. 매점은 슬슬 닫을 시간이기도 했고.
흘낏 바라보니 마리의 상태는 보아하니 약간 불안해보인다. 처음 오는 곳이라 그런걸까, 혹은 곁에 그가 없기 때문일까. 우리가 처음 대면했던 그 때가 떠오른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순간 들었다. 아쉽게도 그건 내 능력으로는 알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오늘 치히로는 특훈이다. 점차 매일매일의 특훈 시간이 늘고 있지만 그건 내 사적인 마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경우에 전적으로 해당한다. 윈터컵을 위해서, 그가 1군 스타팅으로 뛰게 될 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필요한 연습이다. 스테미너도 더 기를 필요가 있고. 마리는 치히로에게 미리 연락받았는지 도서부 일이 끝난 후 농구부 체육관으로 와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다가 문을 나서는 나와 마주쳤다.
[안녕, 마리. 치히로를 기다리는 중이지? 서서 기다리는거보다는 안에서 앉아서 기다리는게 나을텐데. 괜찮다면 따라와주겠어?]
마리는 그 후로 문 안의 치히로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한번 체크한 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나를 순순히 따라왔다. 사실 기다린다면 벤치에서라도 앉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기 뭐했다는 걸까, 대하기 어려웠던걸까.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워한다는건 충분히 느끼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언가를 쟁취하고 거머쥐기 위해서는, 다른 한 쪽은 때때로─아니, 항시라도 버려야 할 각오나 배경을 염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나와 조용한 가운데 체스를 두었다. 치히로가 나오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가량 남았으니 한 세트는 충분히 하고 남을 시간이리라. 나는 흑, 그녀는 백. 딱히 진심으로 한 것도, 봐주면서 한 것도 아니지만 게임은 금방 끝나버렸고, 내가 체크메이트를 말하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앗,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고생했어, 라고 말하자 그녀는 잘하시네요. 라고 가감없는 짧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천천히 체스 세트를 정리하고 나자 딱 나갈 시간이 되어 그녀와 학생회실을 나와 문을 다시 잠궜고, 나는 복도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그녀에게 건냈다.
"아카시군도…."
"아니, 괜찮으니까. 어울려줘서 고마웠어."
"다, 다음에도 불러주셔도…불러줘도 괜찮으니까요. 감사했어요."
그녀는 첫 만남 때 내가 편히 불러도 된다고 한걸 까먹고 있는걸까. 하지만 두세번 반복해서 말하는건 내 취향도 아니고,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게 편하겠다고 생각해 더 말하지 않았다. 체육관으로 다시 돌아가는 조용한 와중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잡담을 했다.
"신기해."
"…네?"
"마리와 치히로가, 서로 분위기가 닮아서."
"아…아. 그거, 예전에도 말했었죠. 아카시군."
"세세하게 들어가자면 물론 다른 사람이니까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마주한다면 아주 비슷하다고 볼텐데. 실제로 들어본 적 있어?"
"아뇨, 아카시군이 처음…."
"그리고─"
─그리고, 왜 내가 네게 끌리는지 모르겠어.
나는 말을 삼켰다. 눈 앞에는 연습이 끝났는지 체육관 문이 열리자마자 마리를 발견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치히로가 있었다.
"다음에 봐요, 아카시군."
"…뭐야, 일찍 들어가지 그랬어."
"연습 수고했어. 치히로. 그럼 차후에, 마리."
연인들에게 등을 돌려 어둑어둑해진 교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둘이 나누는 대화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때까지 좀 더 빨리 걸었다.
─
작은 페트병이 셋.
보통의 마리가 아무리 음료수를 좋아하고, 가끔은 걱정될 만큼 많이 마시긴 한다만 저정도는 아니다. 어디서 났어? 하고 물어보니까 순순히 말해준다.
"아까 잠시 아파서 양호실에 누워있었는데, 나오다가 아카시 군과 만났는데 받았어요. 남았다고."
“아카시가? 아니, 아픈 곳은 괜찮아?”
“네. 잠시 현기증이 난 거라서.”
그러면서 무엇이 잘못됐냐고 묻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한 입 음료수를 마신다. 은근히 그 모습이 행복해보이는 표정이라 뭐라 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 마리 너는 아카시와 오래 지내보지 않아서 잘 모르나본데(사실 나도 오래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 녀석은 그냥 먹을걸 막 주는 녀석이 아니라고. 무언가를 남에게 준다니, 왜? 아프다고 해서 측은히 보는건 아닐테고. 바라는 목적이 있지 않는 한 그럴 일을 할 녀석이 아니다. 고작 음료수인데요, 라고 생각할 지 몰라도 아무래도 마리에게 이런걸 준다면 그 행동에도 목적이 있을거라는 뜻인데… 금방 결론에 도달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연애에 관해서는 모랄도 규칙도 없는 도련님이신가. 그녀석은.
마리가 병을 내려놓은채로 나를 다시 바라본다. 표정이 드러났나보다.
"…마유즈미 선배?"
"아냐. 많이 마셔. 얼마나 마셨어?"
"선배 한 병 드릴까요? 음… 한 병 다 마셨는데."
"많이 마셔. 마리."
순식간에 또 한 병이 반이나 비워진다. 한숨을 삼키고 같이 손을 잡아 교문을 빠져 나가면서, 내일 데이트 건에 대해서 상의한다.
점심 메뉴에 대해서도 어디로 갈까, 하는 소소한 계획을 함께 세워보고 서점을 들렀다가 어디로 갈까, 그 까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 가게는 내일 문을 닫지 않느냐, 집에는 내일 부모님이 계시니까 무리다, 내일 날씨는 더울거 같으니 조심해라 등. 언제나와 같은 데이트 전의 잡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
아까까지 하던 아카시와 마리가 관련된 고민은 잊어버리고 당장의 둘만의 내일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일도 그가 현장을 덮쳐올 줄은 몰랐다. 잘못한건 전적으로 내가 맞지만.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를 짜셨습니까? 하고 항의할 만큼 불공평했다. 불합리했다.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또다시 그가 왔다는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단 말할 수 있는건, 나는 내일의 그 데이트를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나 대신 마리의 곁에서 그 시간을 보낸건 아카시 세이쥬로.
그녀석이었다.
─
─ 마리? 라고 바로 부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시내 한복판인 이런 곳에서 그녀를 보리라곤 예상치도 못했으며, 대단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갑자기 다가가면 놀랄게 분명했으니 나는 일단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냥 넘기고 가기엔 뭔가가 걸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슬쩍 흔들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세상과 유리되어보이는 아주 좁은, 그림자가 지는 공간.
"…아."
"안녕, 마리. 이런 곳에서 보는군."
"아카시…군?"
"무슨 일이지? 누구를 기다리는 거 같은데."
마리는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발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법한 내용이었지만, 사실 듣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마유즈미 선배가… 늦으신다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셔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짤막하게 대꾸한다.
"저런, 유감이야.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래."
"딱히…그럴 생각은 없어요."
"오늘 오래 나와있으면 탈수할지도 몰라. 혹 마리만 괜찮다면, 같이 영화보러가지 않을래?"
"영화?"
"그래, 유명한 베스트셀러 추리물을 바탕으로 만든 신작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나서 혼자 보러가는 중이었어. 심심하기도 하고 치히로가 늦게 온다면 잠깐 다녀와도 늦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니까 괜찮다면 동행을 부탁해도 될까.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면 들어가 앉아서 자도 괜찮아. 끝나면 깨워줄테니."
조곤조곤, 그러나 분명하게 내 의사를 밝히면서 그녀가 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든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면, 또 다시 나는 입을 열 수 있다.
"저번에 음료수 나눠줬을 때, 마리가 다음번엔 사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영화보면서 음료수, 괜찮을거 같은데."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어서서 나를 쫓아오고, 영화관 안 바에서 내 몫까지 음료수를 두 개 샀다. (물론 그녀의 것은 내 거보다 더 큰 사이즈였다) 잡지의 평대로,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도 초반엔 곧잘 보다가 중간부터는 잠들어 내 어깨에 기댔지만. 그건 더욱 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바라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볼에 스치는 얇은 머리칼들이 간지럽고 향기로웠다.
나는 진동이 꺼진 그녀의 휴대폰이 어둠속에서 반짝거리는걸 보았다.
이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진, 감은 눈 안에서 선히 보였다. 안됐네, 치히로. 난 무엇에서든지 승리할 자신이 있어. 내가 호감이라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는 그 이전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쟁취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단지 그가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는게 행운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었을까. 상대가 나라는 것이 그에게는 전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와 도덕, 그런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근새근 고개를 기댄 채로 잠들어있는 그녀의 따뜻한 손을 나는 살짝 감싸쥐었다. 스크린속 영화 장면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밝은 하늘이 비춰지자, 그녀의 옆모습이 보여 가만히 숨을 참은 뒤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아직 이것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
갑자기 데이트 당일에 조모께서 편찮아지셨다고 연락이 왔기에, 병원을 다녀와 허겁지겁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마리는 없었으며 내 전화는 받지 않았고 걱정이 되어 둘러보다가 영화관에서 나오는 둘을 목격한 내 심정은 어땠을지 1000자 이내로 서술해보시오.(5점)
나도 솔직히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말로 나오지 않는 심정이다. 마리에게 인사한 뒤 날 슬쩍보며 돌아가는 아카시의 표정은 농구 경기 시합에서 종종 그가 짓는 싸늘한 모습이었다. 이미 상대와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점수 차가 나서, 승리는 결정되었다고 그가 느낄때. 완전히 상대 팀의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고 생각했을 때.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며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모께서 많이 편찮으시냐고 물었고 나는 미안하다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데이트를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시간도 많이 늦었기도 했지만 그건 일차적인 변명거리이긴 했다.
입을 꾹 닫고, 마리와 헤어져 집으로 다시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미 마리가 그의 눈 안에 들어선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티 날 정도로 그가 행동할 리 없으니까. 아까의 눈빛도 그렇고…한숨이 나왔다. 그녀의 존재감이 좀 더 옅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옅었더라면 그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을까. 아예 농구부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언질을 해놨어야했던걸까. 알 수 없었다. 엎질러진 물이었고, 지나간 평온한 나날은 오기 힘들거란걸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오자마자 씻고 누워, 폰을 들어 마리에게 메일하려다가 그녀가 아닌, 오랜만에 다른 인물으로부터 온 메일을 받았다.
[나와 이야기 할 것 있지 않아?]─아카시
목덜미를 물어띁었으면 됐지 이젠 아주 산산조각 내서 부수려는 지경인가, 이녀석은. 나는 적어도 내일 학교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 일로 고통받고 싶지 않아 메일을 바로 삭제했다. 내일 보는 일도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불가능하겠지. 그냥, 이 일이 없던 때로 ─ 마리와 둘만의 세계─ 돌아가고 싶다고. 오랜만에 비현실적 망상에게 어리석은 소망을 품었다. 나는 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연결음 세 번만에 끊어버렸다. 말할 자신이 없었다.
─
"왔네, 치히로. 마리는?"
"일이 있다고 하고 먼저 귀가하라고 했어."
"헤에, 요즘 아쉬워하던걸. 같이 돌아가는 날이 적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을거 같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 나도 어서 체육관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글쎄. 네가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언제 오늘 치 연습을 시작할 수 있을지가 결정되겠지."
"아니, 아카시. 대답할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곳으로 불러낸건 나인데도 건방지네."
"너, 마리를."
"그녀를─그래."
"좋아하는, 거지."
"어째 아니길 바라고 물어보는거 같군. 자신이 없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답지 않아."
"…시끄러워."
"대답할 의무는 없지만, 이미 넌 정답을 알고 있을거야."
"그게 정답이라면… 난 널 싫어할거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쪽은 아녔지만, 널 마음속으로 쓰레기라고 매도하고 쳐다보지도 않을거니까."
"뭔가 오해하나본데, 내가 원하는 쪽은 마리지. 치히로가 아닌걸.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더해서 마리에게 내 악담을 하거나 뭔 짓을 하더라도 난 자신이 있어."
천천히, 그리고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듯이 바라본다.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은 확언.
"─마리는 내게 오게 될거라고 말할 수 있어."
"…왜지?"
"그게 당연한 결말이니까."
"…너,"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꼴사납게 몸이 부들거리는건 어쩔 수 없었을까. 이건 얼마만에 느껴보는 분노인지.
"치히로.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 변하게 하는건 재화를 긁어모으는거보다 쉬워. 뇌와 혀를 가진 생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너와 내 차이라면 뭘까. 그녀가 지금 널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것 정도야 금방 뛰어넘을 수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도대체…내게, 그녀에게 왜."
갈라진 입 끝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유를 대자면 뭐겠어."
너무나도 우습고 당연한 답을 그가 당당하게 내뱉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몰라, 정말로? 사랑이니까. 난 사랑에 빠진거야. 마리에게,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본 도련님은, 자기 손에 쥐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새인가 그녀를 좇고 있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달리고 있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돼, 라고 외친다고 해서 그가 멈출것인가? 마리가 그의 본심을 알고 도망간다고 해도 그는 놓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점점 아파져만 갔다. 내 앞의 그는 주문처럼 되뇌인다. 마리. 내 전용이었던 그 마법의 주문을, 옥상의 바람에 실어 보낸다.
마리─ 하고. 느릿하면서도 부드럽게.
희열에 찬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은걸 참으며 나는 도망치듯 현기증 나는 이마를 잡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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