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60분 전력 45회 주제: 옥상


※아카시와 마유즈미가 연애 시뮬레이션의 공략 대상 캐릭터라는 설정입니다. 주의.









마유즈미 치히로.

고교 3학년.

182cm, 69kg

취미는 독서, 좋아하는 음식은 쿠사야.

AB형에 특기는 오버클럭.

자신있는 과목은 물리, 좌우명은 청경우독. 성우는 오오사카 료타. 이 정도가 아마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이것보다 좀 더 알 수도 있는데, 당신이 만약 이 게임의 특전 프로필 북이나 그런걸 가지고 있다면 나에 대해서 좀 더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우의 개인 해석이나 당신이 나에 대해서 가진 인상을 더 말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물론 아무리 떠벌거려도 나는 그걸 듣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이름보다 더 자주 불리는, '히든 캐릭터.' 


내 존재 이유이자, 이 미소년(웃음)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이다. 다만 안타까운건 숨겨져있지 않은 노멀 캐릭터들이 나보다 훨씬 인기가 좋아서 힘든 해금 조건을 뚫고 나를 공략하려는 플레이어는, 지금껏 없었다는 점이다. 동정하진 않아도 좋다, 누군가에게 공략당하는건 귀찮고- 딱히 기분좋지 않을 거 같으니까. 이런 내가 봐도 제작사가 시크릿 캐릭터로 넣을 녀석을 잘못 고른 거 같긴 했다. 메타 발언까지는 요즘 게임계에 유행하는 추세니 어떻게 할 수 있다 해도, 이런 그리다 만 흐릿한 인상에 딱히 큰 임팩트 없는 스토리라니. (당신이 아마 나를 공략하지 않았을테니 당연히 모르는 스토리이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잘 나가는 옆 동네 아이돌 캐릭터처럼 적어도 안드로이드 설정은 넣어줘야 조금 팔리지 않겠는가. 쿠사야를 좋아하는 안드로이드라니 그거도 조금 웃기지만. 특기는 어떻게 들어맞는다고 해도.


아무튼 '실패한' 히든 공략 캐릭터, 마유즈미 치히로의 주요 서식지는 옥상이다. 다른 공략 캐릭터들과 플레이어 캐릭터가 마주칠 수 있는 장소는 체육관이나, 교실이나 학생회실이나 제각각이지만 나는 '옥상'이 주어졌다. 옥상에서의 만남이라, 흔한 클리쉐이긴 하지. 그리고 나에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라노베가 손에 들려져 있다. 이미 이 안의 텍스트는-플레이어를 위해서 약 1챕터의 반 정도만 만들어져 있는 가상의 라노베-나는 닳도록 읽어, 외울 정도가 되었다. 입력되어 있기에 '라노베같이 읽기 가벼운 책을 선호한다' 라는 설정이지만, 이 외의 책은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옥상의 남자는 라노베를 들고 있다가 풀썩 앉아버렸다. 1시-점심시간이 지났으므로 플레이어가 여기에 올 수 있는 시간은 지나버렸다. 이걸로 또 오늘도 아무 손님도 없을 예정이니, 적막과 고독을 즐기면 된다.


"마유즈미 상."


...쳇, 하고 들리지 않게 혀를 찬다. 역시 문을 잠궈버릴걸, 이라지만 진짜로 그렇게 하면 중앙 시스템으로부터 경고가 올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옥상의 불청객은 다름이 아니라 <아카시 세이쥬로>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공략 캐릭터이시자,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고 팬 수도 어마무시하게 보유한 녀석. 고양이같은 외모와, 도련님 속성과 조금 가슴 아픈 과거 그리고 사기라고 할 만한 능력을 가진 학생회장 역할의 캐릭터님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외모를 말하자면 나보다 조금 비싼 일러스트레이터를 쓴 거 같은 그런 정도다. ...말만 이렇지 같은 손안에서 태어난 캐릭터겠지만.


"한가하신가 보네요."

"...왜."

"방과후엔 체육관에 오셔야죠. 같은 농구부잖습니까."

"어차피 플레이어는 나와 만난 적이 없어서 내가 가도 상관 없다니까. 거기서는 해금 가능 조건도 없-"

"아뇨. 플레이어의 공략 상대로서가 아니라 '농구부'로서 오시라는 겁니다."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요 몇회차동안 아카시에게 계속 시달림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거부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몇번 따라가곤 했다. 하지만 겨우 프로필상에 적혀진 '농구부' 세 글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날 괴롭히고 싶은게 아닌가, 게임 안에서 부활동을 해 봤자 체력 스텟이 늘어나는거도 아닌데, RPG도 아니고.


"신경 꺼. 옥상에 있을거다."

"치히로."


어이, 플레이어한테만 보여주는 이중인격 모드를 왜 여기서 꺼내는데. 나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일어나(스탠딩 표정묶음에는 없는 얼굴이다) 힘 없이 그를 따라갔다. 라노베는, 옥상에 잘 둔 채로. 


그날 방과후에 역시 플레이어는 방문 부활동으로 농구부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와 얼굴 없는 농구부 부원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카시에게 혹독하게 굴려져 '이거 사실 공략 게임이 아니라 농구 시합 게임이냐.'라 말하며 훈련을 마쳤다.


-


"거의 끝나가죠, 이번 게임."

"...아, 1년짜리인데 벌써 겨울이지."


이번 플레이어는 속도가 빨랐다. 공략 상대는 이번에도 역시 내가 아니었으며-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아카시 또한 아니었다. 한번에 3명을 공략하는 플레이어들도 종종 있었지만, 그러다가는 배드 엔딩을 볼 수 있는 확률이 많았기에(2회차 이상의 능숙한 사람이라면 세이브를 사용해 어떻게든 봤을테지만) 대부분 1명씩 공략하곤 했다. 아카시 또한 조건이 쉬운 캐릭터는 아니기에, 이번에는 공략되지 않았나보다. 그는 나와 함께 옥상에 앉아 색이 바뀐 하늘을 보았다. 옥상에는 4개의 배경이 있다.


"심심하지 않나요?"

"뭐가."

"공략되지 않는 캐릭터라는 것."

"괜찮아. 외로움을 잘 탄다는 설정은 없는데."

"그런 문자적 설정 말고, 당신이 느끼기에 말입니다."


<당신>이라니, 그거 플레이어와 깊은 관계가 되었을때나 사용하는 호칭 아니냐-라고 나는 딴지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캐릭터라니, 그런게 있을 수 있는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조금 팔릴만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거도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낸 설정일테고, 자의적으로 느낄 리는 없다.


"딱히."

"딱히?"

"이대로가 난 좋아."


아카시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웃었다. 괜히 두근거린 기분이 드는게, 확실히 오랫동안 공략당하지 않아서 스스로가 어딘가 망가진게 분명했다.


"오늘은 더 혹독한 훈련을 하도록 하죠."

"그만 해, 어제 네 훈련 이후에 다른 녀석들이 0과 1로 이루어진 구토를 하던거 생각 안나냐? 너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보다 농구부 부장이라는 쪽에 너무 치우쳐진거 같지 않아?"

"훈련 뒤에 또 같이 이야기 나눠드릴테니까요."


나는 결국 툴툴대며 아카시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아카시가 플레이 기간동안 유일하게 날 찾아와준 녀석이라는건, 맞는 말이었다. 가끔 그는 나를 데리고 학교 바깥의 세계에도 나가줬다. 플레이어가 가지 않은 온천 이벤트 장면이라든가, 주말에 플레이어의 자유행동으로 자주 사용되는 공원이라든가, 백화점.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옥상의 철 기둥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라노베 낱장으로 학을 접거나.


-


"졸업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몇 백번은 했다고."


이 게임의 엔딩 이전인, 졸업식이다. 아마 여기에서 플레이어와 공략 캐릭터는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고 올라가는 스텝롤과 함께 키스를 하게 되겠지. 썩 괜찮은 삽입 음악도 재생된다. 물론 내게는 지겨운 음일 뿐이었지만.


"어라."


자동으로, 졸업식이 이루어지는 체육장에서 옥상으로 워프되었다.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끝내, 다시 게임의 배경 시간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 곧 이루어질 것이다. 내 기억은 리셋되지 않는다. 다른 녀석들은 대부분 그런거 같지만... 아카시는 언제부터인가 리셋하지 않았던거 같다. 그가 날 찾아와 준 회차부터였을까.



"이봐, 아카시."

"네?"


이번 회차는 어쩐지 빨리 지나간 기분이었다. 스킵을 자주 쓰는 사람이었나보다. 나는 뭐라 말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옴싹달싹 하고 있다가 가보라는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다음번에는, 공략 대상이 되고 싶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으셨나요?"

"...그럴리가."

"그렇다면?"


...정말이지 끈질긴 녀석이다. 나는 라노베를 들고 이마에 올려 표정이 잘 안 보이게 한 다음 겨우 중얼거렸다. 


"다음 회차에도, 가끔 들러달라고... 플레이어가 널 공략하면 바쁘겠지만."


아카시의 표정이, 그 말을 듣고 눈에 띄게 변했다. 어라, 뭔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제일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오류라도 발생시킨게 아닐까.


"치히로."


거 봐, 스탠딩은 이중인격이 아닌 쪽의 얼굴인데 말하는건 이중인격 쪽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옥상 난간을 꽉 잡고 있었나보다. 그 위로 아카시의 손이 겹쳐졌다. 물론 따뜻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게임 속 캐릭터니까.


"공략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뭐?"

"내가 당신을, 공략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뭐?"

"스크립트 오류 나셨나요? 아니면 CV 녹음 대사 반복중?"

"아, 니. 그게 아니라."


뭔 말을 하는거야.

같은 처지인 주제에 공략이라니.


...스트립트 대사 창에 온통 깨진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공략할 수 있게 해주세요. 좋아하고 있습니다. 첫 눈에 반했었으니까."

"뭘? 언제?"

"217회차 때 옥상에서 서 있는 당신을 보고."

"어디서? ...아, 너 그때 플레이어한테 공략 당하던 때..."

"약속 장소가 옥상이었죠. 구석에 없는 것 처럼 서 있는 당신을 보면서 꼭 이야기 해 보고 싶었습니다. 캐릭터들이 많은 게임이라, 다른 캐릭터와는 거의 만나지 않기도 하지만 당신은 그때까지 저도 모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냥 채도가 낮아서 눈에 안 띄일 뿐이야."

"그래서?"

"...뭘 그래서야."

"공략할 수 있게 해주신건가요?"


이 표정은 반칙이야, 널 공략한 플레이어들이 100퍼센트로 반하게 된다는 필살의 갸륵한 표정이잖냐. 그리고 그 CG 마음대로 써도 되는거냐. 배경의 잔잔한 음악과 이 따스한 빛 레이어는 도대체 어디서 제공받아서 사용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생각 이상으로 제멋대로다. 제멋대로 력(力)이 있다면 아카시는 내게 매일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해보던가. 나, 넷에 공략도 없어서 꽤나 힘든 상대일텐데."


나는 잡고 있던 닳아 헤진 라노베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전히 다른 한쪽 손은 녀석과 포개고 있는 상태였다. 


아카시가 어딘가 오류난게 분명했다. 얼굴 부분에 특수효과 레이어가 하나 더 추가된거 같았다. 붉은 색의 레이어.


"감사합니다. 그럼."

"자, 잠깐? 야? 아카시? 이게 ㅁ..."


아카시가 말을 마치자마자 옥상 위에 엄청난 굉음이 나더니,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고, 아카시는 내 손을 굳게 잡았다.


"그거야 다른 차원으로의 게이트 아니겠어요? 제 설정을 잊으신건 아니겠지요, 마유즈미 상."


아카시 세이쥬로, 이 게임에서 가장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자... 유일한 이능력자. 그러니까 일반적인 공략 연애 시뮬레이션에 이런 설정은 과해도 너무 뜬금없다니까.


-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니까, 옥상이다.

오랜 꿈을 꾼 기분이다. 혹시 점심 시간이 지나버렸나 생각했지만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졸다니,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해서 벽에 기대어있던 몸이 비명을 지르고 나는 저린 손목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물론 읽던 라노베는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다.


-라지만 그림자가, 저 편에 보여서. 꿈에서 몇번이나 본 듯한 누군가의 인영이. 


"마유즈미 치히로 상이시죠?"


아. 일단은 세이브를 해야겠다... ...라지만 이건 뭔 말이지. 얼떨떨한 채로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아카시 세이쥬로라고 합니다."


언제나 여기 있는 나를 잘 아는듯이 그 녀석은 웃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