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유즈미 치히로.

키, 182cm.

몸무게, 69Kg

혈액형, AB형

생일, 3월 1일


그동안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마유즈미 치히로의 생일이란건 그저 그의 농구부 인적사항란에 적혀져있는 나열된 문자 중 하나였다. 오히려 인적 사항 중에서 생일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무리 중 동명이인이 있을 때 구분하는 정도일까, 내가 언제 태어난 누구입니다. 정도를 알려주는 항목이지 실제 그 인간을 알아보거나 자질과 관련해서는 연관이 없는 편이니 말이다. 빨리 태어난다고 우수한건 아니다. 늦게 태어났다고 또래보다 뒤쳐지는것 또한 없다. 결국 생일이란게 인간의 본질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사항은 아니란 결론을 낼 수 있다.


말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마유즈미의 생일은 물론 외우고 있었다. 처음 그의 프로필을 농구부 주장으로서 읽었을때부터 자연스레 외웠으니까, 오래 된 쪽이다. 하지만 그 숫자 두개가 의미를 가지게 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대가 그 누구여도 아마 없을 일이었다. 사랑하면 '처음'이란게 많이 생긴다고 누가 그랬었던가. 우습게 넘겼던 그 말이 맞았다. 마유즈미는 이번에도 처음이란걸 또 가져갔다. 유일하게 기분좋은 빼앗김이었다, 며 생각하던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마유즈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아카시는 그답지 않게 고작 이틀 전에 알아챘다. 그가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쪽은 아녔으니-아버지의 생일 정도야 그 나름의 방법으로 챙기는 편이었으나, 좋아하는 날이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녔다- 이상하다고 할 것까지야 없었지만, 2월은 28일까지 있고 흘러가는 날짜를 보다 보면 가끔 31일까지 있을거라 생각하게 되는데 실수를 할 리가 없는 그가 이러한 착각에 사로잡히다니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평소같았으면 아무것도 아닐듯한 실수도 생일이란게 다가오니, 약 삼일 정도를 떼어먹는 기분이었다.



결국 아카시는 27일날 저녁에 한참동안 응접실에 앉아 고민하다가 고용인의 걱정어린 시선을 오랜만에 받았다.



선물을 사야한다. 간단한 말이었고, 간단한 행위였다. 그러나 마유즈미의 생일 축하 선물을 사야하는데 도무지 무엇을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둘이 사귀기 한 건 아카시의 생일이 지난 이후였고, 그 이후에도 딱히 자신이 마유즈미에게 선물을 받은 것은 없었으니(모르고 한권 더 사버렸다고 떠넘기듯 받은 신간 라이트 노벨은 선물로 치지 않기로 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집에 그걸 가지고 와서 아카시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이건 서로간에 주어질 첫 선물이었다. 아카시 또한 그에게 무엇을 준 그런 경우가 여태껏 없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좋아하니까 물건을 주고싶다-이런 생각보다는 그저 그와 함께 있고 싶다에 집중한 결과일까. 마유즈미는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위해서는 스스로 소비를 하는 쪽인걸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 소비행위에 끼어들어봤자 좋아하지 않을 것 또한 아카시는 알고 있었다. 그 소비 행위 또한 취미 생활에 포함되는거니까.


이렇게 아카시는 마유즈미에 대해서 이것저것 사소한걸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그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도 많았으나 그것들은 이번 사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어째야 할까, 세장 째 그는 메모지를 버리고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볼펜을 내려놓았다. 한 쪽에 놓여진 태블릿형 기기는 쇼핑몰이 띄워져있던 화면이 이내 꺼져버려서 다시 켜야만 했다. 옷도, 음식도, 농구 물품도 꽃도 아무것도 자신은 그에게 줄 것을 차마 정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주던간에 '그래, 뭐냐. 고마워.' 정도로만 담담하게 끝날거 같았다. 자신이 자주 입는 브랜드의 옷을 선물한다 해도 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바라 볼 것이며, 음식은 한번 먹으면 끝나니 무언가 선물로선 할 만한게 아닌것 같았다. 농구화라든지, 를 다시 내밀면 그는 어떤 말을 할까. 아마도 '또 그 짓을 하자고?' 라며 비웃음을 띈 표정을 내보일거다. 그런 원치않는 미래가 선명하게 보여서 씁쓸해지고 조금 풀이 죽었다. 아카시는 탁자 위에 꽃혀있는 생생한 노란 프리지아를 보다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렇게 곤란한 일이 생길줄이야-이제 이틀도 남지 않았는데. 차라리 두달치 농구부 연습 메뉴를 짜는 것과 라쿠잔 3군 멤버마다 다른 지정 연습 형태를 짜는 것이 몇배는 쉬웠다. 검색으로도 누군가의 도움으로도 연륜으로도 해결될 문제가 아녔다.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듯한 그런 갑갑함을 정말 오랜만에 맛보았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런 말은 아카시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갑자기 죄송합니다. 내일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게 아카시가 전날 아침에 보낸 문자의 전문이었다. 일부러 생일축하니 뭐니 보내지 않았다. 마유즈미의 답메일은 잠시 뒤에 왔지만 그 몇분동안 아카시는 너무나도 긴 시간을 맛보았고 [그래. 몇시쯤?] 이라며 거절이 아닌 문자의 조합을 보자 숨을 그제서야 내쉴 수 있었다. 아카시는 집으로 돌아가며 한 손에는 쇼핑백을,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완연한 봄이 되지 않은 날씨 안에서 착각일지 모를 작은 햇빛을 느꼈다. 마유즈미의 생일은 아직 겨울이라고 할 수 있을 날이었다. 자신도 겨울에 태어난 아이였지만 마유즈미 또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일렀다. 그게 괜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괜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런게 가끔 사랑인가 싶었다. 별 거 아닌 사실에서, 기뻐져온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감정이 슬금슬금 퍼져와서 웃을 수 있게 된다. 아카시는 자신의 생일 이전에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선배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 꼭 생일이 아니어도 그가 느꼈으면 좋겠다면서 사 온 선물용 쇼핑백을 내려두기 전에 슬그머니 두 팔 안에 껴안았다. 왜인지 모를 온기가 아까부터 계속, 느껴졌다.


자정에는 축하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


"들어와."


문을 열고 자신을 맞이해주는 마유즈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왜인지 안심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아카시는 손에 든 쇼핑백을 자연스럽게 들고 현관을 통해 집 내부로 들어가는 동안 마유즈미의 눈길이 한순간 쇼핑백에 머물렀다가 이내 돌려졌다는걸 알 수 있었다. 언제 꺼내야 할 말일까, 언제 줘야할까. 아카시는 결국 마유즈미가 마실걸 꺼내오고, 같이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무릎 위에 올려둔 쇼핑백을 두 손으로 들고 말해버렸다. 속전속결은 이럴때 쓰는 말이었나 싶을 정도로.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배."

"...하?"

"...설마 모르셨던건."

"아니, 새벽부터 이상한 곳에서 보낸 축하 메일들이 와 있어서 알았었지만. 그러니까 가입된 사이트에서 생일때마다 보내주는거 있잖아. 그래서 알았지만...챙겨 줄 것 까지야."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유용하게 선배가 써 주셨으면."


약간의 당혹감이 섞인 표정으로 아카시의 손가락과 맞닿으면서, 마유즈미는 쇼핑백을 열어 자신이 받은 선물의 포장을 즉시 풀어 보았다. 봄 때 입을 만한 옅은 색의 가벼운 코트형 겉옷. 브랜드 명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중고가의 물건일 것 같은 옷의 안쪽에는 고급스러운 체크 무늬 안감이 들어가 있었다. 텍은 미리 떼어져있다. 비록 최고의 선택은 아녔지만 아카시에게 후회는 없었다. 대학 입학식때, 그가 입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손수 매장에 가서 사이즈를 맞춰가며 골랐다. 머릿속으로 그가 입어보는걸 상상했다. 벚꽃비가 내릴 그때쯤 잘 어울릴거라면서.


"...그래. 고마워. 알고 있었나보네. 아니, 알고 있어도 이렇게까지 챙겨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오늘 만나니까 일부러 자정에는 메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일찍 축하드리고 싶었는데."

"...로맨틱을 위해서냐?"

"깜짝 선물 같은."

"생일인거 알고 있었다니까. 너한테 메일 오지 않아도 뭐... 오늘 만나서 축하받지 못해도, 상관없었고."

"...제게 축하받고 싶지 않으셨던건가요."


상처받은듯하지만 담담한 어조의 질문에 마유즈미는 한 순간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연인에게 선물까지 받고서 할 만한 말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니, 이내 코트를 다시 쇼핑백 안에 집어넣고 아카시의 손을 잡았다. 시선은 마주보고 있지 않다. 못한다, 쪽이 맞을까도 싶었다.


"크게 축하받거나 이곳저곳에서 선물 받는 날 아녔으니까, 어쩔 수 없는거 아냐? 오늘도 작년도 내 생일을 제일 먼저 축하해준건 야후 메일 서비스였다고. 부모님도 용돈정도나 주시는 날이고. 그리고 네게 생일, 말한적 없으니까. 당연히 모를거라고 생각했다만..."

"처음 만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동아리 입부 인적사항에서 봤으니까. 그리고 잊은 적도 없습니다."


좀 더 선배와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텐데, 그 말을 아카시는 그저 삼켰다. 그러면 작년의 당신의 생일도 재 작년의 생일도 이렇게 함께 손 잡고 있을 수 있었을텐데. 선배가 다음번 생일을 기대하게 만들어 줬을텐데. 아카시가 눈을 내리 깐 그 순간 살포시, 마유즈미의 입술이 볼에 맞닿았다. 갑작스럽고 길지 않은 스킨쉽이었다.


"그으러니까 말이다. 고맙다. ...선물도,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는거도. 기대를 아예 가지고 있지 않던 날이어서 네게 아까같은 말을 해서 미안해. 종종 내가 이렇다는거, 너도 알 때쯤 되지 않았으려나. 눈치 좋고 똑똑한 아카시님인데."

"내게 기대했으면, 해. 좀 더 바랐으면 해."

"...안내 사항은 좀 하고 모드 바뀌어줄래? 어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버튼을 눌렀냐."


소파에서 결국 그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려뜨렸다. 붉은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보자 숨기려는 당황스러움이 빛이 없는 그 눈동자 안에서 느껴져온다. 다음으로 내게 할 말 없어? 라고 두 손을 잡아 속박하듯 당기자 마유즈미는 한숨과 함께 비웃으며 내뱉는다. -아아, 정말. 어쩔 수 없잖아. 매번 이러고. -짜증내면서도 적당히 져 주는 그 볼멘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좋아서 아카시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네 생일, 알려줘라. 아카시."


-


집에 와서 터틀넥을 갈아입으면서 그제야 아카시는 자신이 이걸 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걸 알았다. 목에 걸려있는 붉은 리본이었다. 생일 선물로, 저입니다- 아무리 아카시여도 이걸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아 그냥 집에서 생각만 하다, 어쩌다하고 간건데 그대로 남아있었다. 반쯤 풀린 리본의 끝을 만지작거리자 스르르 풀어진다. 자신을 선물로 주고 그런건 역시 우스갯소리로라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이제 365일을 기다리면 또 연인의 생일이, 온다. 아카시는 어서 봄과 여름과 가을이 평소보다 빠르게 지나가길바랐지만 그 이상으로 그와 함께 보내는 세 계절이 차분하게 반짝이기를, 더 원했다.


사랑에 빠진 어느 겨울의 끝무렵이었다. 함께 먹은 달지 않은 케이크의 끝맛이 아직도 혀에 남아있었다.



03012015 Happy Birthday to Mayuz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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