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 소재 주의/15금


어쩌다가 시작했는지는 지금와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적에 건강하라고 부모님이 자신에게 여자애 옷을 입혔던 것도 아니고. 14살 무렵, 그냥 서랍 한 구석에서 제 몸에 맞을법한 감색 원피스를 발견했기에 치기어린 호기심에 이끌려 입어봤던게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을까. 부모님은 모두 일을 나가셔서 늦게 들어오시기에 마유즈미는 원피스를 입은채로 거리낌없이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 거울을 마주보았다.

-의외로, 여자애 같잖아.

학교에서 꺄꺄 거리면서 무리를 지어다니는 동급 여학생들보다, 자신이 어딘가 더 낫다는 우스운 우월감조차 들었다. 단지 그 감정때문에 마유즈미는 점차 이 괴상한 취미짓거리를 조용히 늘려나갔다.
일찍 방법을 깨우친 통신판매는 유용했다. 용돈을 모아 화장품이나 가발, 옷들을 사모았다. 비싼 브랜드의 것은 사지 못했지만 어차피 나갈 일도 없었기에 중저가의 것들로도 충분했다. 거울 안에서 긴 머리를 가만히 늘어뜨리고, 슬랜더한 몸매의 단아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몇번인가 자신을 상대로 자위한 후에는 자신이 특이한 성벽인가 했지만 뭐, 어때- 라는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일이었다.

"치히로."

아직 굵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본다. 눈을 두어번 귀엽게 깜빡인 후 거울에 입을 맞춰본다. 오래가지 못할 취미란걸 알고 있다. 비정상이라는 것도. 마유즈미는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운 후에 책상에 앉아 숙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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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 끝은 생각보다 의외로 빠름과 동시에 느리게 왔다. 돈을 주고 산 물품들만 아깝게 되었다. 두 달 전에 샀던 세라복 형 상의가 이상하게시리 제 몸에 맞지 않고 작아졌을때부터 조짐이 보였던걸까, 변성기가 급격하게 온 것과 동시에 몸은 쑥쑥 굵어지기 시작했다. 두어치수 크게 샀던 가쿠란 교복이 딱 맞게 되자 마유즈미는 이제 저 짓거리와 작별하기로 마음먹었다. 환상속 여자아이는 그대로 남겨두는게 좋다.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부모님이 출장을 나간 주말 오후에, 마유즈미는 진짜 마지막이라면서 가장 아끼는 스커트를 입은 뒤 긴 가발 위에 모자도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이라면, 마지막이라면 그동안 나가지 못했던 바깥에 나가보자. 혹시라도 동급생을 만날 수 있으니 열차를 타고 멀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시간을 고려해서 최대한 멀리. 운동화끈을 메면서 마유즈미는 중얼거렸다. 여자용 신발은 산 적이 없으니 아쉽게도 신발은 원래의 것을 신고 나가야만 했다. 만약 신었어도, 오래 걷지 못했겠지. 그러나 곧 그보다 더 큰 위기가 다가올 것을 마유즈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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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허벅지에 느껴지는 노골적인 손, 커다랗고 뜨듯한 기분나쁜 감촉. 마유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를 쳐야 할까,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망설이는 사이에 마유즈미가 반항하지 않자 허락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뒤에 바싹 달라붙은 중년의 남자는 목덜미에 거친 숨을 불어넣는다. 사람만 적었어도 이럴 일은 없는건데, 늦은 퇴근 열차에 탄게 잘못이다. 마유즈미는 옆으로 몸을 비틀려고 하나 그가 허리를 붙잡아 새된 소리를 질렀다.

"힉...!"

열차 안은 사람이 많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아무도 제 신음을 듣지 못했겠지만 딱 한명만 이쪽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남자아이였다. 흰 마이를 입은 채로 제 쪽을 바라보자 마유즈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살려줘, 제발. 뭐든 해달란 말이야. 다시는 이런 짓 안할테니까...

그가 눈치 채지 못할걸 마음 한편으론 알고 있다. 남자의 자세는 교묘하게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자신은 존재감이 옅으니까. 귓가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지만 긴 가발 사이에 엉켜 보이지 않는다. 더운 숨이 자신의 입에서도 나올거 같아 구토감이 들었다. 도와줘, 제발! 저보다 어린 녀석에게 필사적으로 속으로 소리쳤다. 여자아이도 아닌데 속옷도 갖춰입은 채로, 추행당하지 않기 위해 다리를 붙이며 열차의 흔들림에 맞춰 흔들거리고 있는 이런 자신이 우스웠다.

"소라 상."
"... ...!"
"소라 상, 맞죠? 저번에 뵜었잖아요."

남자아이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생소한 이름으로 마유즈미를 부르며 미소지은채로 말을 걸고 있다. 중년 남자는 칫, 하고 물러섰고 마유즈미는 그 사이에 재빨리 남자아이 쪽으로 다가가 섰다. 구해줬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정차한 역에 그의 손목을 잡아 허둥지둥 내렸다. 돼지새끼, 개새끼, 천벌이나 받아라. 아아, 살거같다... 지옥같던 열차는 떠나고 내린 사람들이 다 개찰구쪽으로 나가버리자 마유즈미는 자신을 지옥으로부터 구해준 녀석을 바라보았다. 고양이같은 상에, 테이코 중학교라는 교포가 달린 교복 마이. 테이코...? 일단 자신을 빤히 보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하는데 제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 아니다. 아니, 외모도 남들 기준에선 아닐지도 모른다.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나왔지만 누군가는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가령 존재감 없는 자신을 알아차린 이 녀석이라든지. 마유즈미는 가지고 나온 천 손가방을 열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와 볼펜을 들었다.

[실례했습니다. 고마워요.]

역 내는 밝지 않았다. 마유즈미의 글씨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겨우 들이밀은 메모를 읽은 남자아이는 마유즈미의 두 손을 천천히 쥐어 잡았다. 깜짝 놀란 마유즈미는 그제서야 제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져있다는걸 깨달았다.

"다행이네요. 조심하세요."
"... ..."

미안하다고, 말해야한다. 갑자기 역에 내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마유즈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꾹 닫았다. 손을 겨우 뺀 뒤에 메모를 하나 더 썼다. [갑자기 역에 내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남자아이는 정중한 말투로 괜찮다고 했고, 다음 열차가 오는 벨이 이내 울리자 그는 철로쪽을 바라보았다. 허둥대며 마유즈미는 제 가방에서 집에서부터 챙겨온 음료수 캔 하나를 건냈고 남자아이는 사양하다가 받은 뒤에 열차에 타서 가버렸다. 다시 역에 혼자 남은 마유즈미는 왜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메일을 알려줄걸 그랬나. 아니, 차라리 잘 됐어. 겨우 집에 돌아온 그 다음날 마유즈미는 옷과 가발과 화장품을 정리해 다 버렸다. 홀가분하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제 '소녀'의 모습을 단 한명은 봐줬다는게 아련하게 기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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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 음료수 꽤나 깊은 추억이 있는데."
"이거, 꽤나 레어한 품종이잖아? 뭔데? 세이쨩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
"그건 아니지만 중학 시절에 길 가다가 받은 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거든. 난 그때 처음 먹어봤었어."
"헤에, 시음 행사라도 했던걸까~"
"아니, 누군가를 도와주고 받은거거든. 치히로는 마셔봤어?"

무관들과 이야기하다 제 쪽을 바라보자 마유즈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뭔 개소리야.

"... 조금."
"그런가."

웃으면서 아카시는 말한다.

"아직도 그 취미, 가지고 있어?"

캔을 버리려고 뒤돈 마유즈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등에 섬찟하게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빠르게 뇌내에서 회상되는걸 느꼈다. 설마, 그리고, 아니, 그럴리가...

"아니."

그리고 자신의 앞날이 더 엉망진창으로 꼬이리란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