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 소재 주의


"마유즈미 선배, 맞다. 어제 안 왔지? 우리 농구부, 문화재때 메르헨 까페 한대."

잠시 연습 후 쉬는 시간.
재잘거리는 하야마의 그 말에 마유즈미는 마시던 물을 뱉을 뻔 했으나, 침착하게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포커페이스는 나름 자신있는 분야였다) 그 얼토당토 않은 소재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내 귀가 제발 잘못된거라고 해 줘. 메르헨 까페라니 여기가 순정만화지인줄 아냐. 그게 대중들에게 먹힐 거 같냐.

"에? 그렇지만, 애들이 아무도 안건을 안 내서. 아카시가 그냥 이거 하자고 했는걸. 다들 반대도 안 하고~ 아카시가 어련히 잘 짜주겠지."
"넌...그래서...하려고?"
"어려울 거 없잖아? 아카시가 그날 난 스케이트보드 타고 다녀도 된대! 사람만 안 친다면."

즐겁다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하야마를 보며 마유즈미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메르헨 까페, 아무리 되새겨봐도 참 문화재때 안팔릴듯한 소재였다. 요즘은 말이지, 다들 자극적인걸 좋아한다고. 메이드까페가 잘 팔리는거 보면 모르냐. 둘다 '메'로 시작하지만 소재는 달라. 물론 우리 부가 95퍼센트 이상의 남성 부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무튼 메르헨 까페는 아니라고. 타겟층은 누구지? 영 유아? 우리는 그 날 미x마우스나 도날x덕따위의 인형탈을,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쓰고 있어야 하는건가? 차라리 여학우들을 노리는거였다면 멀끔한 녀석들을 뽑아서 집사 까페나 열라고.
제일 좋은건 그냥 상영회나 여는거지만. 그, NBA 영상같은거 말이다. 지나가다가 발이 아픈 녀석들이 와서 보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오아시스같은 역할, 얼마나 멋지냐. 농구부의 미래는 이런 쪽으로 나아가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주장님.

...머리로 아무리 혼잣말과 망상을 해 봐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마유즈미는 수건으로 열이 나기 시작하는 얼굴을 덮은 후에 아카시를 원망했다. 생각해봐도 자신이 가서 바꿔달라고 해도 바꿔줄 리가 없는걸 아는데. 일처리가 빠른게 그의 장점이니까, 이미 축제기획안까지 학생회로 넘어갔겠지. 그저 최대한 몸을 사리고 지내자, 귀찮은건 싫다.

-

-라고 말했던게 삼 주 전. 결국 장대하게 폭풍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운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넘기고, 다들 넘겨서 돌아온 최악의 역할이 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유즈미는 제 손에 들린 천쪼가리를 부들거리며 겨우 잡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까, 그 정도로 얇은 천도 아니지만.
현재 장소는 탈의실. 앞으로 농구부의 러브러브 메르헨 까페 개장까지는 이십분.

"아카시, ... ...저기."

농구부 축제파트의 총괄 책임자이자 스스로도 코스튬 서버 중 한명분을 맡은 아카시는 어색하게 드레스를 입고 걸어나오는 마유즈미를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옷 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붉디 붉고, 싸구려가 아닌 재질로 만들어진 빨간모자의 귀여운 후드옷과 치마를 입은 아카시는 농구를 할 때와는 달리 꽤나 귀여워보여 아직 개장도 안하였지만 그를 밖에서 힐끗거리며 지켜보는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소근거림이 들려왔다. 아직 만 16세도 안되었을테니까, 얘 정도라면 어울릴만 하지. 하지만 자신은 이대로 나가면 우스꽝스러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다들 음료를 시켰다가 풉, 하고 뿜을거라고. 표정이 저절로 찌푸려지자 아카시와 눈이 마주친다.

"아카시, 난 정말로 하기 싫은데."
"그럼 서빙은 빼드리죠."
"그래도 되는거냐?"
"뭐...원래 선배 몫이 아니셨는데, 제가 부탁해서 억지로 맡아주신거니까. 손이 그렇게 부족하진 않을겁니다. 그리고 이거 앞에 단추를 잘못 끼우셨네요. 들어가서 다시 하고 오세요."

그렇게 말하곤 가슴아래 허리쪽의 코르셋을 슥 매만지는 손길에 소름이 돋아 마유즈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왜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지는거냐, 허리가 너무 조여져서 그런가... 의문의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은 채로 마유즈미는 다시 드레스 앞 섶을 풀어헤쳤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은 보통의 남자의 몸에 판판한 가슴, 별 거 없는 갈색 유륜과 그 아래의 옅게 잡힌 근육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드레스같은거 입어봤자, 저 녀석의 눈에 띄일리가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가 흠칫, 하고 자기 자신에게 놀라 뒷걸음질쳤다.

아카시의 눈에 자신이 들길 바라는가?

...뭘 입고 뭘 하든간에 자신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바라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지끈거리는 가슴을 한번 꾹 지긋이 손바닥으로 누르고, 아까 아카시가 매만졌던 허리께를 툭툭 쳐 본 다음 다시 옷을 껴 입었다. 끔찍하다는 신음이 저절로 나온다. 그나마 자신도 1학년이었다면 조금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키도 지금보단 작았고 얼굴도...그렇게 남자다운편은 아니니까. 치렁치렁한 가발까지 쓴 뒤에 (극구 거절하여 겨우 휘황찬란한 금발은 피하고, 제 머리색과 비슷한걸 고를 수 있었다) 화장도 어색하게 하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맡은 마유즈미는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역할에 알맞게 침대에나 누워있고 싶다. 공주가 왜 서빙을 해야하나고.'

다만 빨간 모자는 까페 개장이 3분 남은 때에 싱긋 웃으며 제게 쥬스를 건넸고, 그 뒤로는 불행하게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졸려와서 말이다. 어어, 하고 핑 도는 시야때문에 마유즈미는 구석의 의자에 비틀비틀 다가가 겨우 앉았고, 누군가의 수근거림이 들린 후 번쩍 업혀져서 어디엔가 눕혀졌다.
그는 그날 스케이트 보드 타는 사자 하야마의 묘기도 보지 못했고, 마녀 분장을 한 미부치도, 재활용품으로 만들어져 걸을때마다 쨍쨍 소리가 나는 양철나무꾼의 코스튬을 입은 네부야와도 만나지 못했다.

그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을 뿐이다.

-

"어라...?"

겨우 무거운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었다. 아니, 좀 더 눈에 익으니 옆에 있던 물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축구공 농구공, 훌라후프, 뜀틀, 원반 등 나란히 정리되어 있는 다양한 체육용품들. 자신은 중앙의 매트리스 안에 고이 누워져 있었고, 옷을 더듬어보니 아까의 그 축제용 코스튬 그대로이다. 까실거리는 가발의 인조모가 볼을 간지럽혔다. 등에는 기분 나쁜 식은땀이 가득 흘러 옷과 붙은 상태였다.

"깨셨군요."
"...뭐야, 이거."
"시작하자마자 선배가 잠드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요즘 졸리셨나요? 여길 축제용 부원 휴게실로 만들어둬서 다행입니다. 축제는 거의 끝났어요. 오늘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근조근 상황을 설명해주는 그의 말에 하아, 하고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아직도 어지럽다. 뭐가 어찌 됐는지. 요즘 빈혈도 없는데 픽 쓰러진건가. 마유즈미가목마른걸 알아챘는지 아카시가 물병을 건낸다. 입을 대고 마시려다가, 아까 립스틱을 발랐다는걸 기억하고 입을 뗀 후에 고개를 들어 마셨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시선이 왜인지모르게 따가웠다.

"전 그럼 마저 정리 하러 나가보겠습니다."
"...아아."

아카시가 후드를 흔들며 문을 열고 걸어 나간뒤, 마유즈미도 제 옷가지를 정리하고 일어서려고 했다. 흐린 불빛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유즈미는 제 허리 코르셋쪽을 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리본이, 제가 묶었던 것과는 다르게 묶여져 있었다. 틀림없다. 자신은 예전부터 남들과는 다르게 리본을 묶어왔고, 아까 오전에 쓰러지기 전에도 분명 그렇게 묶여있었다. 지금 제 허리 코르셋에 달려있는 리본은 누군가 그 묶음을 풀은 뒤에 다시 묶은거였다. 소름이 돋아 다시 털썩 앉았다.

누군가가 내가 자는 사이에 내 몸에 손을 댄건가?

침착하게 아니, 쓰러졌으니 그냥 숨을 편하게 쉬라고 풀어줬던거일지도 몰라. -라고 상상해봐도 왜 다시 묶었는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후다닥 일어나 남들의 시선은 개의치않고 바로 구석의 화장실로 들어가 칸 안에서 제 단추를 끌러내렸다.

역시, 가슴쪽에 누군가를 꼭 닮은 붉디 붉은 표식이 있었다. 그걸 보자 눈 앞이 캄캄해져 다리 힘이 풀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채로 헛 웃음만 나왔다.

범인은 그 녀석밖에 없겠지.
그러나 '왜'를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신기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