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전력 60분 참여- 주제: [비밀]



"마유즈미 선배의 말씀은, 그러니까..." 


아카시는 마유즈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사실 마유즈미가 어딜 보고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같은 자세로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마유즈미가 말했던 내용을 종합해보았다. 


"저와 선배 사이를 비밀로 하라는 말이겠군요." 

"애초에 이런 얘기가 필요했던건진 모르겠지만 잘 알아들은거 같아서 다행이네." 


하아,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마유즈미는 특유의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전날은 농구부의 퇴임식, 그리고 마유즈미와 아카시가 사귀기로 한 첫날이었다. 그말인 즉슨 오늘이 이틀째라는건데 둘의 사이에는 어제의 따뜻한 눈빛은 불구하고 냉정하며 비즈니스적인 기류만 맴돌고 있었다. 


사실 이게 정상이지. 정상보다는 보통인, 일반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려나. 


아니, 아무튼 마유즈미가 기분이 좋지 않은건 아닐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둘은 학생식당에서 담소와 함께 식사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온 참이니까. 마유즈미가 무언가 심각한걸 말하려는듯 약 삼분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서 아카시는 살짝 불안해졌었지만 잡았던 손을 놓지는 않았다. 겨울의 옥상은 춥다. 그를 위해서라도 너무 이곳에 오래 있어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비밀이어야지." 

"당연히, 입니까." 

"당연히-인거다. 아까 말했듯이 어차피 난 곧 졸업해서 여길 떠나버리겠지만 넌 아니잖아. 라쿠잔의 인기스타이시자 회장님이신 분과 관련된 연애사가 만 천하에 소문이 나서 불명예스럽게 얼굴에 먹칠이라도-" 

"아뇨." 


아카시는 굳은 얼굴로 바로 말을 자르고, 반박했다. 


"선배와의 연애는 제게 불명예스럽지도, 먹칠도 아닙니다. 회장의 자리와 주장의 자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건 아니지만 제겐 이제 그 무엇보다도 선배가... 중요해요." 

"자랑스러워요." 

"선배를 사랑하는게. 선배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안됩니까?"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갸륵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착하게 부탁하는듯한 낯간지러운 내용' 삼연속 공격에 넘어갈 뻔 했지만 겨우 본 목적을 기억해냈다. 다리가 후들거릴 뻔 했어.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계속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유즈미는 훽,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냥 비밀로 하자." 

"...그게 편할거야. 우리 모두에게 귀찮지 않고. 일반적이고." 

"너도 똑똑한 녀석이니까, 내 뜻은 잘 이해할거라고 믿어." 


<Mode: set; Akashi Seijuro /love Mayuzumi Chihiro ="secret"> 

=not profit! 


"...만약 어쩔 수 없게 들킨다면?" 

"그럴 가능성이야 많겠지만, 학교 내에선 최대한 조심할거고. 외부 데이트를 하더라도 사람 많은 곳은 잘 안 갈 예정이니까." 

"들킨다면 부정하실겁니까?" 

"뭐...그건 그때 가봐야겠지. 상황에 따라." 


어물거리며 답하기를 넘겨버리는 마유즈미의 옆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카시는 쥔 손을 올려 그의 손등에 키스했다. 치히로는 두려워하고 있는거야. 

나와의 관계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문제와 현실과 감정이 복합되어있을듯한 그의 마음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으나 그래도 낯선 상황과 단어였다. '비밀'이라니, 남들에게 들키면 안될 사이라니. 아카시는 그런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남들 앞에서 과시를 하고 싶었다. 몰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만나서 같이 하교해야하는 사이? 세상의 보편적인 연인들의 성별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해도, 이럴 것까진 없는거였다-라고 생각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연인인듯한 두 명의 라쿠잔 학생이 서로 나란히 손을 잡고 운동장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다가, 여학생쪽이 남학생쪽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게 보였다. 딱히 지나가는 학생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가서 떼어두지도 않았고. 


비밀로 할 것 까진 없잖아, 그냥 저렇게 있는 것처럼 있고 싶을 뿐이다. 억지인걸 알면서도, 아카시는 어느정도 자신이 이 건에 대해서 어른스럽지 못하다는걸 뺨이 차가워졌을 쯤에야 깨달았다. 


"들어가자. 너 얼굴이 엄청 붉어졌는데." 


연애 둘째날부터 우리의 관계는 비밀로 하자는 마유즈미가 조금 미운건지, 마유즈미가 눈치를 보게 되는 주변 사회가 마음에 안 드는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채로 아카시는 종치기 전에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역시 이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없앨 수 밖에 없잖아? 



[죄송해요, 학생회 일 마무리할게 있어서 학생회실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마유즈미는 그 메일을 받고 잠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후문에서 다시 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우니 안에서 기다리는게 낫겠지.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면 더 좋고. 아카시가 불렀으니 아마 그곳엔 그 혼자일 것이다.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예상대로 아카시가 상석에 홀로 앉아있었고, 마유즈미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내 턱을 괴고 그가 처리하는 문서를 바라보았다. 정갈한 손글씨군, 새삼 느끼면서. 

오랫동안 둘 사이에는 시계소리만 흘렀다. 


"선배." 


쪽, 하고 가볍게 볼에 댔다 떼어지는 키스. 조용한 학생회실 안이라서 소리가 괜히 더 울렸다. 가만히 있던 마유즈미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그제서야 턱을 괸 손을 내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입술을 마주하고 겹치는 그 순간- 


드르륵. 


"5시부터 회의 맞지?" 

"나 자료를 두고 온 거 같..." 

"도서부장은 왔어?" 

"앗, 학생회장, 안녕하..." 


둘은 수 많은 학생위원장들과, 각 부서의 회장들 앞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자세로 포착되었으며 안경을 끼고 있던 여자 서기는 들고 있던 서류들을 다 떨어뜨려버렸다.(다른 사람들도 메두사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몇 분 동안 굳었다가 아카시가 바라보자 허둥지둥대며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마유즈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카시는 조용한 혼란 속에서 마유즈미의 어깨에 손을 올린채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모두에게 말했을 뿐이다. 


"회의는 5시 15분부터인데 다들 일찍 와주셨네요." 


그 뿐이었다. 



"졸업식때 날 납치해서 감금해줘. 이 세상에서 마유즈미 치히로라는 녀석을 영원히 없애달라고." 

"무리에요, 별장에 가고 싶으신거라면 추후 스케쥴을 알아보겠습니다만." 

"네 권력으로 내 졸업장을 없애줘." 

"졸업은 하셔야죠." 

"아예 마유즈미 치히로가 라쿠잔에 입학하지 못하게 해 줘라." 

"과거 개벽의 원리까지는 알지 못하니까, 진정하세요." 


헛소리를 하는, 조금 망가진 마유즈미를 데리고 (어제의 그 일 후로 마유즈미는 자신의 반에 있는 녀석들이 자신을 보며 은근슬쩍 소근거리는거같다고 투덜거리며 호소해왔지만 의외로 타격이 없는 듯 보였다) 아카시는 농구부 라커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냥 후문에 있겠다고 했지만 오늘 날씨는 어제보다 더 추워져, 그 고집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데려온 참이었고. 


"일 정말 많나보네." 

"죄송해요. 금방 끝날겁니다." 


아무도 없다는걸 휘휘 둘러보고도 마유즈미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가방에서 라노벨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그의 옆에 앉아 남은 일들을 처리했고, 이내 밤동안 또 뭘 했는지 곧 졸기 시작하는 마유즈미의 고개를 제쪽으로 기울이려고 하던게 화근이었다. 아카시의 터치에 놀란 마유즈미는 발버둥치다가 기우뚱 쓰러지는 의자에서 바닥으로 넘어졌으며 옆에 있던 의자까지 흔들려 그를 덮치는 자세로 아카시가 쓰러졌다. 


입술이 맞닿은건 정말 몇 초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어이, 아카시! 연습 다 했..." 

"세이쨩~ 애들 데리고 러닝 다 돌았..." 

"뭐야? 왜? 둘다 왜그ㄹ..." 


부축해 일어서게 하고, 허리 뒤에 손을 둘러 그를 껴안은 채로 연습을 하고 돌아온 농구부원들을 향해 (아마 체육관 안이 아니라 야외에서 뛰고 있던 듯 했다) 평소처럼 말하는 아카시를 풀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유즈미는 기절했다. 



"이상으로 학생 회장의 졸업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교가 제창을..." 


끝나자마자 졸업식으로부터 탈출할 생각이 만만한 마유즈미는 몇번이고 제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축사를 하던 아카시와는 눈이 마주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라쿠잔 내에 자신과 아카시의 관계가 퍼진걸 생각하면 자신은 조금만 더 여기 오래 있다가는 조금 과장을 보태서, 계란 세례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삼학년인게 정말 다행이다. 안녕, 라쿠잔이라는 이름의 지옥! 마유즈미가 잘근잘근 아랫 입술을 씹으며 소악마, 아니 청개구리 대마왕같은 연인에 대해서 부득부득 이를 조용히 가는 순간 졸업식이 드디어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좋아, 이 사이에...- 


"마유즈미 선배." 


신이 있다면 아마 자신에게 두번째 기절을 맛보게 하고 싶어하는 사디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마유즈미는 겨우 제정신으로 해냈다. 아니, 분명 사디스트는 저 녀석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가학을 매일매일 주고 있다. 

세이쥬로는 사디스트의 S. 분명할거다. 


마유즈미는 식이 끝나자마자 제 상반신의 반만한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제쪽으로 다가오는 아카시를 할 수만 있다면 염동력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서 사진도 찍고 꽃다발도 받으려는 3학년 학생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이쪽으로 모조리 쏠렸고, 아카시가 가는 길목은 모세의 기적처럼 주변이 갈라졌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마이크도 없는데 왜 이렇게 오늘따라 아카시의 목소리는 경쾌하고- 밝고- 또박또박한지! 아니, 쥐 죽은 소리도 없게 된 이 졸업식장이 나빴다. 겨우 표정을 갈무리하고 마유즈미는 꽃다발을 받았다. 고맙다고 작게 중얼거린걸 들었은지 아카시는 환히 웃었다. 


더 웃긴건 졸업회장이 또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delete; mode "secret"> 


"이번일로... 후우. 네가 얼마나 제멋대로인 녀석인지 잘 알았어." 


마유즈미의 한숨은 며칠전의 것보다 깊었지만 아카시는 승리한듯 그의 손을 여전히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 고양이스러운 행동에 (키워본적은 없지만 아마 이럴 것이다) 마유즈미는 그와 눈을 마주쳤고, 아카시는 뻔뻔스레 말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어, 치히로. 적어도 내 앞에선." 


정말로 아카시 세이쥬로 앞에서는 그렇다는 걸로 이 촌극의 막은 내려진다. 마지막 옥상에서 내려와 둘은 손을 잡고 같이 하교했다. 몇 번이고 마유즈미가 빼려는 시도를 했지만 토끼를 삼키는 코브라 뱀처럼, 아카시는 놓치지 않았다. 새삼 얼마나 무서운 녀석과 사귀게 되었는가, ...하고 느끼며 마유즈미는 제 이마의 주름을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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