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전력 60분 주제: 기회


"...거절이야."


약 5분간의 침묵 후에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거 뿐이었다. 그거마저도 겨우 짜낸 말이었고, 정신이 혼미한 나는 그저 이 옥상을 어서 뜨고 싶었지만 옥상의 유일한 출입구인 곳에는 녀석이 서있었다. 그러니까 불가능, 무리. 또 뭐라고 해야할까.


"재고해주시죠."

"싫어."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저는..."

"아니, 다시 들어도 바뀌지 않으니까."


내 얼굴은 지금 어떻게 보일까. 아마도 볼썽사납게 굳어 있거나, 마비가 와 있으려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황하는 때가 적어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뻣뻣한 나무인형처럼 서서 난간에 기대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카시 세이쥬로 말이다.- 그저 고백을 받았을 뿐인데, 세상이 180도 뒤바뀌어버린거 같다.


고백, 이다.

그런 이벤트가 뜨길 바란적은 단 한번도 없다. 뭘 걸고서 말할것도 없이 동성의 후배에게 고백이라니.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이다. 요즘 유행이라는 여성향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도 이러한 전개는 다들 지루해 할 것이다. 아아, 물론 저 녀석은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고백은 명백하게 내 쪽에서 거절이라고. 그러니까...난감하다. 거절을 했는데도 돌아가지 않는다. 끈질기다. 


흉흉한 빛을 띄기 시작하는 녀석의 눈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면에서 거절인가? 이미 침묵하는 동안 실컷 생각했지만 녀석의 말대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1. 상대는 남자다... ...뭐,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만 요즘도 동성애는, 그닥 주변의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한다. 녀석이 여자아이였다면, 나는 반 정도는 긍정적으로 대답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애초에 전제가 그렇다면 녀석이 내게 반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2. 나는 녀석을 연애상대로 보지 않는다. 1번보다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거다. 2번만 충족된다면 솔직히 1번은, 별거 아니라고 하니까. 사랑은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까. 


글로만 배운 로맨티스트의 논리다. 나는 하, 하고 코웃음치며 자조했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그럼 세상에 가짜로 안되는게 있나."

"... ..."


날 바라보는 아카시의 표정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어이, 그동안 우리가 부활동을 하면서 LOVE를 키워왔다고 생각하는거냐? 우정이라고 해도 무리라고. 물론 부활동 이외의 시간에도 만나긴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활동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녀석을 좋아할 생각조차 없었다. 캡틴, 이긴 했지만.

그리고 이젠 끝이고.


"마유즈미 상..."


아카시는 한번도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초조해했다. 어디서 임무라도 받고왔다고 솔직히 말해주지 그래, 나하고 사귀면 우주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혹은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이지. 흔한 라노베 클리쉐지만 그래도 나쁜 전개는 아니다. 그래도 그런 그를 밀치고 지나가버릴 정도로 내 맘이 모질지는 못해 나는 다리에 힘을 풀고 삐딱하게 녀석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구름 없는 하늘을 보았다. 고백하기엔 나쁘지 않은, 그닥 춥지 않은 날이긴 했다.


"...기회를 주세요."

"기회?"

"그동안 마유즈미 상에게는 제가 그런 존재로 비춰지지 않았던거니까요."


그런 존재라면 연애 상대인가. 당연하지. 부 활동을 하면서 누가 그런 상대를 찾길 바라겠어...땀 나는 농구부이고, 매니저도 남자뿐인데. 차라리 농구공이랑 연애를 하는 편이 이상하지 않다.


"두 달, 아니. 한 달이라도 좋아요. 대학 학기가 시작하기 이전까지라도 좋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그 답지 않은 저자세는 아니지만 나름 공손히 부탁하고 있었다.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회, 라니. 이렇게 쉽게 기회를 줘버리면 뭐가 되는거냐. DEMO기간이라는건 알겠어. 하지만 이세상에는 DEMO가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 책의 뒷표지에 써져있는 다섯줄로는 모든 줄거리를 알지 못하며, 새로 사려는 펜은 분명 테스트를 하고 샀는데도 며칠 쓰지 않아 고장나버리는 경우가 많아 짜증을 일으킨다. 하물며 한 달정도로 [아카시 세이쥬로]를 내가 알 수 있을까. 남을 알아가는건 귀찮은 일이다. 저녀석은 부탁을 빙자한 강요를 하고 있다.


"마유즈미 상."

"-생각중."

"...생각이 많으시군요."

"네게 기회를 준다면 내가 얻을 메리트가 있을지. 내 시간도 써야하고 노력도 써야할텐데."

"그거야."


아카시는 한발자국 더 다가와 나와 가만히 마주했다. 뭔가 다짐했는지 아까와는 명백히 다른 태도다. 움찔, 하고 한발자국 물러서려 했지만 기억하라, 어리석은 자여. 여기는 옥상 맨 끝. 차가운 난간앞이다.


"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실 수 있는 메리트가 생기는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이가 없는 녀석의 어필을 듣는 동안 녀석은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를 잡고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잠깐, 난 허락도 안 했다고. 표정이 또 찌푸려지자 아카시는 날 보고 웃는다.


"웃는 편이 좋아요. 아까 '일년 동안은 나쁘지 않았어.' 라고 했을때처럼 말입니다."

"...젠장."


타인에게서 내 모습이 어떤지 말을 듣는건 꽤나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귀가 왜 화끈거리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맘대로 하라며 손을 까딱거려 녀석에게 돌아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럼 토요일 12시에 만나요. 멋대로 정해버린 그게 우리의 첫 데이트였다. 훗날 나는 이 기회를 녀석에게 너무 쉽게 줘버린걸 몇번이고 후회하게 된다... ...알고 있어도 줬을테지만. 


뭐, 제멋대로인 녀석이니까 어떻게든 받아냈을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에 대한 가책이 쌓인 마음이 편해져 나는 자리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